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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미술관장 이경성 ‘혁명가의 음식’ 국수 즐겼다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 설치할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다다익선’에 대해 논의 중인 김원(건축가, 다다익선의 구조설계), 유준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이경성(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백남준(왼쪽부터), 1980년대 중반. [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 설치할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다다익선’에 대해 논의 중인 김원(건축가, 다다익선의 구조설계), 유준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이경성(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백남준(왼쪽부터), 1980년대 중반. [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이경성(1919~2009)은 키가 크고 미남이었다. 그 집안사람들이 다 그러했다. 개화를 빨리 받아들였던 인천에는 먹거리의 근대화도 빨리 찾아왔다. 그 상징으로 밀가루가 있었다. 이경성은 밀가루와 국수로 큰돈을 번 집안의 도련님이었다.
 
1937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에 입학했다. 도쿄에 도착했을 때, 역으로 마중 나온 사람은 약속과는 달리 엉뚱하게도 이남수라는 미술학도였다. 그 인연을 따라 미술관과 화랑을 다니며 자연스레 미술을 공부하게 됐다.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입신양명하거나 집안의 사업을 이어받으려는 의지가 점점 줄어드는 대신 궁핍의 길인 미술을 향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1941년 모친의 중병으로 인천으로 돌아와 징병을 피하기 위해 잠시 경성지방법원의 서기로 근무했다. 핑계를 대고 도쿄로 돌아가서는 아예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등록하여 미술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1943년의 일이었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이 실례가 되겠습니까?” 도쿄의 청년 미술학도 이경성이 개성의 부립박물관장으로 있던 미학자 고유섭(1905~1944)에게 보낸 편지의 첫머리다. 같은 인천 출신의 선후배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미술에 관한 질문과 답변의 서신만 왕래하는 사이에 고유섭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이경성은 고유섭에서 배운 바가 컸다. 그의 권유에 따라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통론고고학(通論考古學)을 구해다 읽어 보기도 했다. 이경성이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일할 것을 결심하게 된 것은 고유섭의 가르침이 결정적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소게츠미술관 관장 등 지내
 
화가 김환기(왼쪽)와 함께한 이경성. [연합뉴스]

화가 김환기(왼쪽)와 함께한 이경성. [연합뉴스]

미술사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도쿄를 향한 미군기의 공습이 점점 심해졌다. 문학부에 입학한 그해 가을 포화를 피해 인천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해방됐다. 광복이 되자 그해 10월 31일 초대 인천 부립박물관(현재의 인천시립미술관) 관장이 됐다.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박물관장으로 10년간 일하면서 미술의 현장에서 여러 작가를 만났다. 1·4후퇴 때 이경성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1951년 부산에서 열린 전시미술전(戰時美術展)에 대해 민주신보에 ‘우울한 오후의 생리’라는 평론을 기고하여 미술평론가로 데뷔하였다. 당시는 화가가 미술평론을 겸할 때였다. 창작으로부터 독립한 순수한 미술평론가는 이경성이 국내 최초였다.
 
홍익대가 서울 종로에 있었던 1954년부터 2년간 시간강사로 미술사를 가르쳤다. 미술평론가의 길에 더욱 매진했다. 감각이 뛰어나 작품 수집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홍익대에 근무하던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열렸던 이중섭의 개인전을 수화 김환기와 함께 찾아갔다. 이중섭의 작품 ‘흰소’를 5만원에 구입했다. 이중섭으로서는 일본의 가족을 만나기 위한 자금 마련의 전시였는데 결국 일본행은 좌절된 채 다음해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작품은 현재 홍익대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이화여대에 박물관이 건립되자 관장을 맡으며 조교수가 됐다. 교수, 평론가 등 그에겐 여러 직함이 있었지만 그는 주로 관장으로 불렸다. 홍익대 박물관장,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워커힐미술관 관장, 도쿄의 소게츠(草月)미술관 명예관장 등을 거쳤다.
 
1989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데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宏 1927~2001)의 전시가 열렸다. 대나무를 소재로 하여 이케바나(꽃꽂이)를 현대적인 설치작업으로 보여 준 전시였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감각이었던지 전시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재일작가인 최재은이 그 대나무를 그대로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로 가져가 자신의 설치작업으로 재탄생시켜 크게 히트를 쳤다.
 
데시가하라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영화로 제작할 때 감독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 예술가였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인 미야케 이세이(三宅 一生)가 존경하는 선배인 데시가하라의 전시 오프닝을 응원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그런 한편 데시가하라는 이경성을 존경했다. 그는 소게츠류(草月流)의 3대 가원(家元) 계승자 자격으로 나중에 이경성을 소게츠미술관의 명예관장으로 모셨다.
 
이경성의 드로잉 ‘사람들’, 1988. [중앙포토]

이경성의 드로잉 ‘사람들’, 1988. [중앙포토]

소게츠미술관 명예관장으로 근무를 할 때 이경성의 숙소는 요쓰야(四谷)에 있는 뉴오타니호텔이었다. 서울에 있다가 도쿄에 오면 먼저 라멘 가게부터 찾았다. 국수공장 사장의 아들답게 면 종류는 다 좋아했다. 가끔 후배인 전시기획자 우에다 유조(上田雄三)가 라멘 나들이의 식우(食友)가 되어 도쿄의 밤거리를 함께 걸었다.
 
1950년대까지 일본의 라멘에는 반숙계란이나 돼지고기 차슈가 얹히지 않은 심심한 맛의 30엔짜리가 주류였다. 이경성이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학창시절의 라멘도 그 수준이었을 게다. 그가 학창시절 도쿄에서 만난 학우로 화가 김흥수(1919~2014), 조각가 조규봉이 있었다. 청춘들은 라멘 한 그릇에도 마냥 즐거웠다. 라멘 몇 가락을 후루룩 삼키자 청춘의 시간이 거짓말처럼 다시 뜨겁게 몸속 깊숙이 밀려왔다.
 
미술계에서는 미식가로 인천 출신들을 앞세운다. 이경성, 갤러리스트 정기용,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이흥우 등이 대표적인 미식가들이다. 이들의 선배격으로는 『먹는 재미 사는 재미』의 저자인 의사 신태범(1912~2001)이 있다. 그는 국내 최초의 미식 칼럼니스트였다. 신태범은 정기용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았다. 백남준의 절친이기도 한 정기용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에 두루 정통하다. 불문학 전공에다 프랑스 미술계에 수많은 지인을 두고 있는 갤러리스트에 어울리게 와인에 관한 각별한 감식능력의 소유자로도 유명하다.
 
인천 출신의 미식가들은 고급스러운 미식취미 못지않게 평범하고 소박한 음식과 식자재에 애정을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이흥우는 3000원 미식론을 주장했다. 발품을 팔아 3000원 이하의 가격으로도 기특한 미식을 누릴 수 있어야만 진정한 미식가라 했다. 그 이상의 가격으로는 바보도 미식가가 될 수 있다 했다. 1990년의 3000원이면 요즘 가치로 환산해서 만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정기용은 수백만원짜리 고급 와인과 몇천원짜리 싸구려 와인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태연했다. 요즘도 경동시장에서 천원이 더 싸면서도 맛있는 시금치 다발을 용케도 찾아낸다. 신태범은 의학자답게 물텀벙(아귀) 등 값싸고 맛있는 인천의 제철 식재료를 요령 있게 설명해 주었다. 인천 출신의 미식가들은 서민음식 속에서 맛의 진수를 찾아내는 실속파들인 셈인데 재료감각이 유별났다. 봄이 오면 이경성 관장 댁에서 만든 슴슴한 간장 게장을 미술계 사람들이 맛볼 수 있었다. 관장직을 수행하려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게장으로 보답했다. 게장은 귀물 축에 들어갔다.
 
이경성이 즐긴 라멘은 결코 비쌀 수가 없는 음식이다. 그는 평범한 한 끼를 귀중하게 다루었다. 짧은 시간으로 끝날 수도 있는 한 끼의 식사를 풍요로운 대화로 길게 늘여 숭고한 의미망을 엮어 내는 능력과 교양을 가졌다.
 
 
값싸고 빨리 먹는 국수, 혁명가의 물성 지녀
 
그는 관장 생활이 길었기에 대학원의 미술사 수업을 미술관에서 할 때가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아직 과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덕수궁 석조전에 있을 때였다. 수업을 마치면 학생들을 미술관의 부속공간인 현대미술관회의 다용도실로 초대했다. 당시로써는 귀한 원두커피 마시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다방의 조잡한 싸구려 커피 맛밖에 모르던 학생들에게는 충격적인 미적체험이었다. 자칫 공허한 관념으로 치우칠 수도 있는 미술이론을 원두커피 마시기를 통한 섬세한 감각의 일깨움으로 보완해 주었다. 미각의 향상은 미적 판단력의 고양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을 가진 그였다.
 
이경성은 말년까지 라멘, 스파게티 등 국수 요리를 즐겼다. 국수는 혁명가들의 음식이 아니던가. 값싸고, 빨리 먹을 수 있고, 면을 끊지 않고 길게 흡입할 때 식도가 막히면서 죽음의 유사감각을 감지케 한다는 점에서 절박한 삶의 혁명가에 어울리는 물성이라 했다. 그런데 이경성은 절박과는 먼 순탄한 삶을 산 걸로 알려져 있다. 항상 따뜻하고 관대하며 긍정적이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혁명가 이경성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닐까. 고등문관시험을 포기하고 전도가 난망한 미술사학자의 길로 과감히 들어선 그때 급속히 담금질 된 혁명가의 마음을 깊은 곳 어딘가에 평생 숨기고 살았던 건 아닐까.
 
말년의 그의 삶은 소박했다. 마음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유명 작가의 작품은 소장하지 않는다는 미술평론가의 철칙도 지켰다. 대신 본인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사람을 주제로 한 드로잉 소품이 대부분이었다. 창작과 평론을 분리했던 미술평론가의 반항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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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