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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달려가서 드럼이라도 치겠다" 울부짖은 쇼팽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9)
폴란드라는 이름은 ‘들 혹은 평원’을 일컫는 말에서 왔다. 폴란드는 강대국 사이의 너른 들판 위에 있는 나라여서 인근 나라들과 교통이 수월했다. 그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주변 강대국의 침략 속에 끊이지 않는 시달림을 받았고 그때마다 폴란드인은 애국심과 독립심을 키워왔다.
 

바르샤바 무기고를 습격하는 봉기군(1831), 마르친 잘레스키(Marcin Zaleski) 그림. ⓒPublic Domain [출처 Wikimedia Commons]

 
폴란드는 1795년 이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지도에서 사라졌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잠시 서유럽의 자유로운 근대시민 사회의 공기를 호흡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1807~1815)의 설립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가 폴란드를 둘러싼 세 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폴란드인에게는 나폴레옹과 프랑스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주도하는 근대적 질서로의 개혁을 사회 여러 방면에서 실행해 가는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민족의식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희망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 폴란드인들은 그동안 당한 것을 돌려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여 동참했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러시아의 추위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따라 바르샤바로 들어온 러시아는 폴란드를 제정 러시아의 일부로 만들어서 러시아 황제가 그 왕을 겸하는 폴란드 왕국으로 개편하였다.
 
본때라도 보여주려는 듯 러시아는 폴란드인을 거칠게 다루었다. 폴란드인은 감시와 통제를 받았고 바르샤바 공국 시절 누렸던 자유는 철회되었다. 민족 자긍심은 짓밟혔다. 잠깐 맛본 자유를 잊지 못한 폴란드인들은 울분을 숨기며 반감을 감추었지만 러시아의 통제가 강할수록 그 울분과 반감은 커져만 갔다.
 
바로 그때 등장한 쇼팽과 그의 음악은 그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그들의 자긍심을 다시 살려주었다. 폴란드인의 위대함을 음악천재 쇼팽이 증명이라도 하는 듯 느꼈다. 쇼팽이 그들의 민속 음악에 바탕을 둔 마주르카와 그들의 정신이 살아 있는 폴로네이즈를 만들어 연주했을 때 그들은 뜨거운 민족애를 느꼈다.
 
아마도 일제하에서 우리의 민족이 아리랑을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쇼팽을 보내는 고향 친구들의 모습이 비장했던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 온 것이었다. (전편 참조)
 
폴란드인의 억눌렸던 울분은 수면 아래서 응축되고 있었다. 우연히도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자마자 바르샤바 시내와 총독이 거주하는 벨베데레 궁벽에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포악한 총독 콘스탄틴 대공은 군대의 경계수위를 높였고 위험인물의 감시를 강화했다. 쇼팽이 떠나고 3주일 후,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동이 트기 직전 한 무리의 폴란드 청년 장교들이 벨베데레 궁을 습격하였고 콘스탄틴을 살해하려 하였다. 그는 피신했기에 살해에는 실패하였으나 대신 무기고를 점거했다. 이것을 기화로 곧 폴란드 전역에서 압제자 러시아에 대항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한때 폴란드 봉기 군은 바르샤바에서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고 승리와 독립을 선언했으나, 해를 넘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정은 달라졌다. 러시아는 정예부대를 지원 군대로 보냈고 치열한 전투를 거쳐 쌍방이 큰 피해를 보았다. 곧 봉기 군의 한계가 드러났다. 폴란드군은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아래에서 조직적 저항을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조직력에서 앞서는 러시아군은 대가를 치른 끝에 폴란드 반군을 진압했다.
 
스토츠크 전투(Battle of Stoczek, 1890), 얀 로센(Jan Rosen) 그림, 폴란드 군사박물관 소장. 봉기 초반인 1831년 2월, 봉기군은 스토츠크 우코프스키에서 러시아 지원군을 물리쳤다. ⓒPublic Domain [출처 wikipedia]

스토츠크 전투(Battle of Stoczek, 1890), 얀 로센(Jan Rosen) 그림, 폴란드 군사박물관 소장. 봉기 초반인 1831년 2월, 봉기군은 스토츠크 우코프스키에서 러시아 지원군을 물리쳤다. ⓒPublic Domain [출처 wikipedia]

 
역사적으로 보면 폴란드는 일찍부터 (16세기 후반) 공화정을 도입하였었는데 이는 귀족회의(Diet)에서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구조였다. 민주적인 듯이 보였으나 단점이 있었다. 왕은 허수아비 같아서 실권이 없었고 귀족들이 힘을 나누어 갖는 체제였기에 시민국가 직전의 근대 열강들의 특징인 강한 왕이 이끄는 전체적 국가가 폴란드에서는 나올 수 없었다. 또한 만장일치제도를 채택한 귀족회의는 과단성 있는 결정을 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이 구조에서 자신의 세력 보존을 우선시하는 유력 귀족들은 서로 간에 알력과 갈등을 되풀이했고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외국의 세력과 가깝게 혹은 멀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부세력의 침략을 받았을 때 각기 이해관계가 다른 그들에게 일사불란한 항쟁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것이 폴란드의 잇따른 시련의 원인이었다. 열강의 눈에 폴란드는 주인 없는 땅으로 보였다.
 
봉기를 진압한 러시아의 폴란드에 대한 지배는 한층 삼엄하고 살벌해졌다. 학교 교육에서 폴란드 민족적인 것은 배제되었고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강요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쇼팽이 다니던 바르샤바 리세움은 폐교되었다. 그 학교 교수였던 쇼팽의 아버지 미코와이는 교직을 잃었다. 반러시아 운동에 가담하거나 러시아 황제에게 불역하는 폴란드인은 시베리아로 유형 가야 했다.
 
많은 폴란드인은 조국을 떠났다. 다수의 지식인과 귀족들은 유럽의 중심도시 파리로 갔다. 지켜야 할 이권이 유럽에 남아있으면 대륙을 떠나기 어려웠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멀리 바다 건너 신대륙을 택하기도 했다.
 
한편 쇼팽은 빈에 도착하고 얼마 후 바르샤바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봉기 소식에 빈까지 동행했던 티투스 보이체홉스키는 봉기 군에 합류하기 위해 즉각 귀국하는 것을 선택했다. 쇼팽도 가겠다고 했지만 티투스는 그를 만류했다. 주저하던 그가 뒤늦게 티투스를 쫓아 나갔으나 친구가 탄 마차는 벌써 떠난 뒤였다.
 
쇼팽. 1831년 빈 체류 때 무명화가에 의해 그려졌다.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말파티 박사 가문이 이 그림을 개인적으로 소장했었다. 바르샤바 쇼팽 기념관 소장. [사진 송동섭]

쇼팽. 1831년 빈 체류 때 무명화가에 의해 그려졌다.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말파티 박사 가문이 이 그림을 개인적으로 소장했었다. 바르샤바 쇼팽 기념관 소장. [사진 송동섭]

 
그의 친구 얀 마추진스키, 보진스키가(家)의 안토니와 펠릭스도 저항군에 합류했다. 당시 보진스키 형제들은 18세, 16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전쟁터로 달려갔다. 쇼팽은 자신이 봉기 군을 위해 드럼이라도 치겠다고 울부짖었다. 그의 부모와 스승 엘스너는 돌아오지 말고 음악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했다.
 
그는 병약해서 군대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었다. 쇼팽의 지인들은 모두 그가 음악으로 폴란드에 기여하는 길도 충분히 있다고 여겼다. 쇼팽의 부모로서는 어렵게 외국까지 보냈는데 중도 귀국은 그 동안 들인 돈을 허비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빈에 눌러앉았으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바르샤바의 봉기는 오스트리아의 공기마저 바꿔놓았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협력관계였기에 빈의 폴란드인은 불손한 사람으로 취급 받았다. 한해 전 쇼팽이 받았던 환대와 지지는 찾을 수 없었다. 연주회를 열기도 쉽지 않았다. 어렵게 연주회에 참가했지만 평가는 싸늘했다. 일 년 전에 자신에게 열렬한 애정을 보였던 인사들도 이제는 그를 피했다.
 
의기소침한 쇼팽을 베토벤의 주치의였던 궁중 의사 말파티(Johann Malfatti)박사가 위로해 주었다. 그의 아내는 폴란드인이었기에 쇼팽의 심정을 잘 이해했다. 그는 자주 쇼팽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함께했고 ‘예술가는 특정한 국가의 주민이 되기에 앞서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말파티 박사의 사촌 여동생 테레세(Therese)는 베토벤이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할 때 염두에 둔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테레세 말파티. 그녀는 빈에서 쇼팽을 돌보아 준 말파티 박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의 엘레제는 테레세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베토벤의 청혼을 거절했다. 본의 베토벤 기념관 Beethoven-Haus, Bonn 소장. ⓒPublic Domain [출처,Wikipedia]

테레세 말파티. 그녀는 빈에서 쇼팽을 돌보아 준 말파티 박사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의 엘레제는 테레세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베토벤의 청혼을 거절했다. 본의 베토벤 기념관 Beethoven-Haus, Bonn 소장. ⓒPublic Domain [출처,Wikipedia]

 
러시아는 폴란드인이 쇼팽을 통해 느끼고 있던 민족적 감정을 알기에 그가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쇼팽은 프랑스로 가고 싶었지만 갈수 없었다. 프랑스는 시민혁명으로 소란했고 주변국의 지배자들에게는 불온한 사상의 온상이었다.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는 과거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당사들이었고 나폴레옹 시절에는 영국과 함께 반프랑스 동맹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를 위해 그의 여권을 압수해서 여행을 못 하게 했다. 경찰서에 가서 여권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면 잊어버렸다는 답이 왔다. 폴란드의 공식대리였던 러시아 대사관에 새 여권을 신청했지만 그들은 시간만 끌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쇼팽의 의지였다. 그는 어느 쪽이든 길을 정하고 그 결정을 밀어붙이는 의지가 부족했다. 몇 개월이 지났다. 빈둥거리며 피아노에 근심을 쏟아내던 그에게 한 친구가 조언했다. 파리를 목적지로 하지 말고 런던을 목적지로 신고하라는 것이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친구였다.
 
그렇게 하자 경찰은 여권을 돌려주었다. 이어 러시아 대사관에 여행 허가를 신청했다. 대사관은 고민하다가 독일의 뮌헨까지만 여행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다. 쇼팽은 프랑스 대사관에서 “런던으로 가기 위한 파리 경유”라고 적힌 비자를 받았다. 마침내 바르샤바를 떠난 지 8개월 후 그는 빈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는 파리였다. 아버지 미코와이는 리세움 폐쇄 후 수입이 줄었으나 여행경비를 보내주었다.
 
여행 도중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바르샤바 함락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집이 없어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정복자 러시아군은 폴란드인들을 더 무자비하게 대했다. 쇼팽은 러시아에 분노했고 가족과 첫사랑에 대한 걱정에 애가 탔다. 당시 그가 작곡한 그의 연습곡 작품번호 10~12번, ‘혁명’에는 그의 격한 감정이 담겨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그의 격정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831년 9월 중순이었다. 초겨울에 집을 떠났던 그가 막 가을빛이 물들려고 하는 파리의 거리에 섰다. 이 새로운 도시는 그저 ‘런던으로 가는 경유지’인가 아니면 생의 나머지 반을 보낼 곳인가? 앞길은 몰랐다. 다만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프랑스인의 후손이었지만 그러한 핏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화려하고 바쁜 이 도시의 거리에 곧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불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파리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쇼팽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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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