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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단독 인터뷰] “문재인이 대통령 노무현을 만들었다”

■ 잠재됐던 노무현의 사회비판적 의식에 불질러
■ 둘이 안 만났다면 문재인은 김앤장 변호사, 노무현은 갑부됐을 것

박정규 前 민정수석의 노무현·문재인 이야기



참여정부 당시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왼쪽)과 박정규 민정수석.

참여정부 당시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왼쪽)과 박정규 민정수석.

 "기사 쓸 거 없을 텐데? 밥이나 먹고 가소.”
 
박정규(71)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끝까지 인터뷰를 수락하지 않았다. 몇 달에 걸쳐 만남 자체를 고사했다. 그러다 새해 들어 ‘점심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행위는 마음을 여는 첫 단계다. 그렇게 1월 10일 점심 자리가 마련됐다.
 
전 수석은 대검찰청 공보담당관을 지냈다. 기자의 습성을 아는 것으론 소위 ‘선수’다. 처음 보는 기자가 그냥 밥만 먹고 갈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을 터다. 왜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박 전 수석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정수석이었다. 2004년 2월부터 그 이듬해 1월까지 청와대에서 일했다. 그의 전임 민정수석이 문재인 현 대통령이다. 그리고 그의 후임 민정수석도 문재인이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박정규라는 이름을 대입하지 않으면 연결이 되지 않는다. 사법연수원 졸업생 문재인을 부산의 변호사 노무현에게 소개시켜 준 이가 바로 박정규 당시 변호사였다.
 
박정규는 노무현과 문재인을 누구보다 오랫동안 지켜봤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어떻게 다르고, 그 지향성의 차이가 어떻게 국정운영으로 표출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역설적으로 그럴수록 그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독일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경구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 그는 민정수석 퇴임 후, 단 한 번의 공식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박 전 수석은 월간중앙을 만났다. 인터뷰 전제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술을 못 마시지만 3월에 폭탄주 마시면서 또 얘기하자”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2시간에 걸쳐 이뤄진 대화는 남았다. 박 전 수석은 선명하게 선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만 말하는 화법이었다. 가령 노무현·문재인 두 대통령의 차이에 대해서 재차 물어도 그는 그저 “글쎄, 몰라” 하고 빙긋 웃을 뿐이었다.
 
박정규 전 수석은 카랑카랑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5년 만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혈류나 혈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언변에는 딱 떨어지게 설명하긴 힘든데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었다. 언뜻 거침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세심했다.
 
검사 시절, 그의 철두철미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언론을 상대하는 공보관 시절에도 그는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면 밤 9시에 집으로 들어갔다. 그 전까지 점심에 폭탄주 10잔, 저녁에 10잔 이상을 기자들과 마시고 일어났다. 9시에 맞춰 검찰청 앞에 부인이 차를 세워놓고 기다렸다. 그와 정 2차를 하고 싶은 기자가 있으면 집으로 불렀다. 중수부장이 주재한 기자단과의 저녁자리에서도 9시가 되자, 아무 말 없이 퇴근한 ‘사건’은 전설처럼 회자된다.
 
박 전 수석에게 밥 앤더슨이라는 이름을 들을 줄 몰랐다. 스트레칭 체조로 유명한 세계적 권위의 트레이너다. 지금도 새벽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1시간30분 동안 운동한다. 호흡법, 근력운동, 플랭크, 유연성 운동까지 다 한다.
 
이렇게 철저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끄집어내려다간 먹히지 않는다. 그저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듣는 편이 낫다. 게다가 박 전 수석은 기자가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해 출신인 박 전 수석은 부산고 출신이다. 1년 재수를 해서 1969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 인명록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46년생, 박 전 수석은 48년생이다. 그의 집안은 김해 장유사에 오래 전부터 봉양을 드렸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까지 3대가 독자였다. 아슬아슬하게 대(代)를 이어왔다. 이에 할아버지 박수덕 옹은 장유사에 불공을 지극정성으로 드렸다. 그 덕분이었는지 할아버지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뒀다. 박 옹은 손자만 24명을 봤다. 김해에서 정미소도 운영하는 등, 꽤 부자였던 박 전 수석의 집안은 자손이 늘어날수록 장유사에 공양을 많이 했다. 그 인연으로 대학생 박정규는 사법고시 공부 터를 장유사 암자인 장유암으로 정했다. 장유사는 48년 배를 타고 온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 장유화상 허보옥에 의해 건립됐다고 전해온다.
 
 
노무현 대통령과 절에서 고시 공부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과 문재인 대통령(왼쪽)의 부산 인권변호사 시절. 법무법인 부산은 대통령을 둘이나 탄생시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과 문재인 대통령(왼쪽)의 부산 인권변호사 시절. 법무법인 부산은 대통령을 둘이나 탄생시켰다.

박 전 수석은 “1970년인가 1971년 여름방학 때”를 운명적 만남의 시간으로 기억했다. 공부하러 왔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둘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명은 노무현, 또 한 명은 정상문이라고 했다. 훗날 정상문은 청와대 비서실 총무비서관으로서 노 대통령 임기 처음부터 끝까지 보좌했다.
 
박정규는 노무현과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절에서 고기를 먹을 순 없다. 노무현은 주말이 돌아오면 박정규를 데리고 봉하마을에 있는 형 노건평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고기를 나눠먹으며 노건평과도 친분이 쌓였다.
 
처음에는 내심 깔보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듣자 하니 노무현이라는 형님은 고졸(부산상고 졸업)이라고 했다. 밥이나 축내러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얘기를 나눠보니 아니었다. “대화를 해보면 기가 막혔다. 아는 것을 조리 있게 말할 줄 알았다. 아는 것은 5개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10개 이상이었다.”(웃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발’은 통찰에서 나왔다. 이후 숱한 경험을 통해 그 능력은 강화됐다. “청와대에서 보고를 하면, 그 뒤에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먼저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우리는 노 대통령만 봤으니 다른 대통령은 어떻게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장유암 기거 당시 또 하나의 비화는 권양숙 여사와의 연애담이다. 그때 이미 권 여사는 ‘고시수발’을 들고 있었다. 장유암에 놀러 오곤 했다. 박 전 수석은 “방에서 같이 자고 있는데 새벽에 쓱 사라졌다. 그분 스타일이 솔직하다. 나중에 물어보면 ‘양숙이 만나고 왔다!’ 하고 버럭했다.”(웃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의 스킨십도 곧잘 화제에 오른다. 세간에는 연출이라는 말도 도는데 박 전 수석은 일축했다. “그것이 실제 모습이다. 김 여사는 수석 모임 할 때부터 봐 왔는데 원래 씩씩하다. 문 대통령한테 원래 살갑게 한다. 금슬은 노 대통령, 문 대통령 두 분 내외 다 좋다. (집사람에게)양보하는 스타일이다. 아마 두 분 모두 (경제권을 일임해서)자기 손으로 돈 만져본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노무현 인생은…
변호사 노무현이 1987년 2월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서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 그 왼쪽 옆에 변호사 문재인이 있다.

변호사 노무현이 1987년 2월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서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 그 왼쪽 옆에 변호사 문재인이 있다.

 
노무현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 박정규는 시보(보조)로 사무실에서 일했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변호사 시보는 그 시절의 박정규였다.
 
당시 노무현은 부산에서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그때만 해도 (변호사 노무현은) 돈에 밝았다. 부산에서 가장 돈 잘 버는 변호사였을 것”이라고 떠올렸다. 영화 [변호인]에도 나왔듯 한때 요트를 탈 정도로 많았던 돈은 노무현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떨어진 탓에 많이 까먹었다.
 
박 전 수석은 언젠가 권양숙 여사를 찾아가 사과(?)한 적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였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이었다. “대통령님한테 ‘문모씨’를 소개 안 했으면 빌딩 몇 채는 가지고 사셨을 텐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여기서의 ‘문모씨’는 문재인 대통령이다. 물론 농담이다. 그러나 뼈가 있다. 만약 문재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노무현의 인생은 달라졌을 수 있다.
 
세상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관계에서 주도권이 노 전 대통령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이 권력의지를 갖게 된 것도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과 연관이 깊다. 문 대통령은 ‘운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박 전 수석의 생각은 다르다. 1980년대 당시 부산의 부르주아 변호사 노무현의 의식을 바꾼 이는 변호사 문재인이었다는 것이다. 잠재돼있던 노무현의 사회비판적 의식에 불씨를 지핀 이는 문재인이었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노무현과 문재인의 만남 자체가 극적이었다. 박정규는 노무현보다 5년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약간 늦게 합격된 터라 53년생인 문재인과 사법연수원 동기가 됐다. 이곳에서 문재인과 박정규는 처음 알게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재인은 술을 즐기지 않고, 얌전하고 반듯했다. 문재인이 판사에 임용될 성적을 냈음에도 대학 때 시위 전력 탓에 불발된 사건도 소문이 나서 박정규의 귀에 들어왔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쯤 변호사 노무현에게 연락이 왔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은 돈도 잘 벌었지만, 특이한 점이 있었다. 모든 수입을 구성원들이 n분의 1로 동등하게 나눴다. 대표 변호사인 노무현과 신입 변호사의 월급이 같았던 것이다. 즉 박정규가 입사만 하면 바로 꽤 큰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노무현은 “박 시보도 나랑 변호사 같이 하면 n분의 1로 주겠다. 오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박정규는 따라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검사에 목을 매는 분이셨다. 판사도 안 된다고 하셨다. 장인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여차여차해서 내가 검사를 해야겠다고 하니 변호사 노무현이 바로 반응했다. ‘에이 X, 그럼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하고 가소!’”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판사 임용에서 탈락한 문재인이었다. 바로 연락을 취해 “‘노무현 선배라는 사람이 인품도 괜찮고, 돈도 잘 버니까 부산에서 변호사 해라’ 권했다. 그러니까 그냥 오더라.” 1982년도였다.
 
당시만 해도 변호사는 금값이었다. 삼성에 입사하면 바로 임원이 될 정도였다. 그 무렵 문재인이 로펌 김앤장의 입사 제의도 받았다는 사실을 박정규는 나중에야 들었다. 문재인은 대기업과 김앤장을 마다하고 부산의 변호사 노무현을 찾아간 것이다. 정작 김앤장은 박정규가 검사를 그만둔 뒤 입사했다. 박정규가 김앤장에 가게 된 다음에야 문재인은 “저도 연락이 오고 그랬습니다”라고 귀띔했다. 만약 그때 노무현의 제안을 박정규가 수용했다면 셋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문재인과 노무현의 인연은 시작될 수 있었을까?
 
박정규는 “둘이서 죽이 맞더니 나중에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웃음) 변호사 문재인이 변호사 노무현에게 상당히 영향을 많이 줬다”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실상은 다를 수 있다. ‘노무현이 대통령 문재인을 낳은 것이 아니라 문재인이 대통령 노무현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는 말에 박 전 수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우·신재민 폭로는 시대의 진보
조국 민정수석은 현 정부에서 상징적 위상을 갖는다. 그만큼 반대 세력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 사진:연합뉴스

조국 민정수석은 현 정부에서 상징적 위상을 갖는다. 그만큼 반대 세력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 사진:연합뉴스

 
민정수석의 위상은 독특하다. 역대 대통령들은 민정수석을 정권의 최후 보루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가 뚫리면 다음은 대통령 차례라는 위기의식이 그것이다. 조국 민정수석과 결은 다르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도 우병우 민정수석을 엄호했다.
 
민정수석을 먼저 경험한 박 전 수석은 조 수석을 온정적 눈길로 바라봤다. 그는 “교수 시절의 조국을 노무현 대통령도 좋아했다. 자리를 하나 주려고 했는데 안 했다. 당시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조 수석을 국회에 출석하게 만든 김태우 전 수사관 사건에 대해 박 전 수석은 짧게 말했다. “내가 민정수석 할 때 그렇게 아무 데나 가서 취득한 정보를 본 일이 없다. 법무부 장관의 인사안을 고치려고 생각도 안 해봤다. 뭣도 모르면서 인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부탁밖에 안 된다.”
 
참여정부에서 노 전 대통령은 경찰과 독대를 하지 않았다. 민정수석이 경찰 자료를 본 적은 물론 있다. 그러나 박 전 수석은 “봐 봤자 아무것도 없더라”고 말했다.
 
박 전 수석은 김태우 전 수사관 사건,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의 폭로를 시대의 진보로 바라봤다. 그는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청와대 직원들이 말썽을 피울 수 있다. 우리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정리했다. 그렇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지금 조국 수석은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보는 눈이 많은 데다, 조국은 그런 것은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다. 신재민이나 김태우 같은 사람도 나오고, 나라가 더 발전하고 그러는 거다. 지나고 보면 일이라는 것을 꼭 매끄럽게만 처리하는 것이 답이 아니더라. 시간이 흘러서 많은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조국은 지금 시대에 맞는 스타일로 나가고 있다. 옛날처럼 협박을 하든지, 회유하든지 하면 김태우 같은 이는 표면적으로 안 나타날지 몰라도, 돈도 엄청 들고 다른 부작용이 생긴다. 나라가 근본적으로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춰가고, 시대의 사명을 잘 수행해가고 있다. 그런 관점으로 봐주시라.”
 
사실 노무현, 문재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박정규 전 수석은 평생 보수로 살아야 체질에 맞는 사람이었다. 집안 정서부터가 그랬다. 당시만 해도 세상이 엉성해 박정규의 아버지는 부산과 김해에서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박정희를 찍고, 차 타고 부리나케 김해 가서 또 박정희를 찍은 분이다. 우리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정권은 바뀌면 안 된다’고 늘 말했다. 그 이유가 ‘있던 놈들은 처먹으면 배불러서 더는 못 먹는데, 바꿔놓으면 굶은 놈들은 더 달라든다’였다.”(웃음)
 
그러나 노무현, 문재인과의 인연은 그의 생각의 궤적까지 바꿔놓았다. 박 전 수석은 “그들을 알게 됐고, 청와대까지 들어갔다가 왔다. 진보 쪽에 서는 것이 내 운명이 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역시 ‘운명’을 말했다.
 
 
“文 대통령의 남은 40개월, 기대한다”
2004년 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사진 왼쪽)이 박정규 변호사(오른쪽)에게 민정수석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2004년 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사진 왼쪽)이 박정규 변호사(오른쪽)에게 민정수석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고시 공부할 때부터 노무현은 “서로 잘되면 도와주자”는 말을 했다. 그때만 해도 이 말의 무게를 몰랐다. 평생 서로 의리를 지켰고, 인연을 이어가다 보니 이제 노무현, 문재인이 무슨 언행을 했다고 하면 항상 그들 편에서 이해하려는 습성이 생겼다.
 
마침 1월 10일은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있던 날이었다.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에 소득주도 성장, 대북정책에 관한 내용이 화제에 올랐다. 역시 경제 얘기가 화두였다. 문 대통령이 극적으로 경제정책 방향을 전환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이를 두고 자리에 동석한 이가 ‘노무현 대통령은 고집이 세지만 결국은 변화가 된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듣는 것 같은데 끝내 안 바뀐다’고 말했다. 박 전 수석은 “문 대통령이 고집이 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이 유연한 것은 맞다. 나는 경제는 잘 모르지만 동반성장은 맞는 것 아닌가? 세계의 혁명 역사가 다 모순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내가 세금을 더 많이 내더라도 우리가 먹고 살고 안 디비지려면(뒤집어지려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부의 양극화를 제어하기 위해 국가가 정책을 행사하는 것은 책무라는 소리로 들렸다.
 
다만 정책 실행 과정에서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방향이 정해졌다면 적어도 정부와 여당은 원팀으로 진행해야 된다고 전제했다. 건건이 이견을 제시하는 것이 외부에 노출되면 동력을 떨어뜨린다고 보는 시각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는 5년, 즉 60개월이다. 문 대통령은 이제 20개월을 통과했다. 아직도 40개월이 남아있다. 박 전 수석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대를 상당히 하고 있다. 순수하고 장난치지 않는 것은 다 인정하지 않는가? 끊임없이 가치를 추구할 것이다. 그래서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온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박 전 수석은 “미국과 한국 보수층이 들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했다”고 봤다. 대북 보상보다 비핵화를 우선시하는 듯한 뉘앙스 띤 점을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이 반미적 성향을 가졌다는 일각의 시선에 대해서도 “후보 때 ‘반미하면 어때?’라고 말은 했지만 대통령 되고 나서 경기도 평택 그 넓은 땅을 (미군에) 제공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현실주의자였다. ‘미국 없이는 안 된다’는 노 대통령의 얘기를 직접 들었다”고도 회고했다.
 
2019년 1월에서 정확히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4년 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 2기 체제를 출범시켰다. 문희상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이 물러나고 김우식 비서실장, 박정규 민정수석 체제로 개편됐다.
 
박정규는 사시 합격 뒤 검사로서 광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청주지검 영동지청장, 대검찰청 공보담당관, 법무부 조사과장, 서울지검 동부지청 형사 3부장을 지낸 뒤 2000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민정수석으로 들어갔다.
 
그의 등용은 노 전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 강화 차원의 포석이었다. 고향 후배인 박 전 수석이 그 누구보다 대통령 집안 사정을 잘 알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문 대통령은 끊임없이 가치를 추구할 것”
박정규 전 민정수석은 검찰 공보관을 거치는 등 친화력이 남다르다.

박정규 전 민정수석은 검찰 공보관을 거치는 등 친화력이 남다르다.

민정수석에 임명된 지 정확히 한 달 만인 3월 12일 대통력 탄핵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의 권한정지 기간에 탄핵심판 사건의 주무 수석비서관을 맡았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선고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다. 63일 만이었다.

 
그러나 박 전 수석은 2005년 1월 이기준 교육부총리 임명자의 부실 인사 파문에 책임을 지고 정찬용 인사수석과 동반 사퇴했다. 이후 더 이상 공직에 갈 기회는 없었다. 그가 물러난 다음 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대통령도 9일 임종석 비서실장을 노영민 주중대사로 교체한 뒤, 그 다음 날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지율이 떨어지고, 위기감이 깊어질수록 자기 진영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아울러 기존 정책노선에서 후퇴하지 않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박 전 수석의 “문 대통령은 끊임없이 가치를 추구할 것’이라는 표현은 적확하게 들렸다. 물론 박 전 수석은 호의를 담아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편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꺼리는 문 대통령의 확증편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과연 문 대통령의 ‘가치 추구’는 어떻게 귀결될까.
  
 
-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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