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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검찰 공안, 46년 만에 간판 뗀다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 영정 사진을 든 우상호(가운데) 의원. 우 의원 옆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 사람은 배우 우현(왼쪽)씨다. [우상호 의원 페이스북]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당시 영정 사진을 든 우상호(가운데) 의원. 우 의원 옆에서 태극기를 들고 선 사람은 배우 우현(왼쪽)씨다. [우상호 의원 페이스북]

"공포의 대상".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던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당시 검찰 공안부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 의원은 "당시 대부분의 인권 탄압은 경찰이나 국정원 등 1차 수사기관에서 자행됐다"면서도 "수사 지휘와 일률적인 기소·구형을 공안 검사들이 했기 때문에 모두 한 몸통"이라고 지적했다. "검사실 가서 매 맞고 따귀 맞고 잠 못 자고 밤새 수사받은 적도 있다"고도 털어놨다. 
 
'공포의 대상' 검찰 공안부가 46년 만에 간판을 바꿔 단다. 이름은 '공공수사부'가 확정적이다. 검찰에 따르면 법무부와 대검찰청은 지난해 말 공안부를 공공수사부로 명칭을 바꾸기로 하고 올해 상반기에 법령 개정 등 관련 절차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검찰 관계자는 "시대 변화에 따라 검찰 공안부에 쌓인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공안은 가지 마라"…바닥 친 사기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검찰 공안의 입지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더 초라해졌다. 남북관계의 급속한 진전에 따라 과거 공안부의 핵심 업무였던 대공 분야 수사는 이제 0.1% 수준에 불과하다. 대공 사건의 빈자리는 선거와 노동사건이 차지했다. 공안부 명칭 변경도 지난해 6월 법무부 산하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4월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공안부장검사 회의. [연합뉴스]

지난해 4월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공안부장검사 회의. [연합뉴스]

공안검사들은 "정권에 따라 부침을 겪었지만 지금만큼 바닥을 친 적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수도권에 근무 중인 한 검사는 "후배 검사가 '어디를 가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공안은 가지 말라고 한다"며 검찰 분위기를 설명했다. 애초 공안부를 공공수사부가 아닌 '공익부'로 명칭을 바꾼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땐 반발도 거셌다. "우리가 옷 벗으면 소집해제 되는 거냐"라며 자조 섞인 목소리도 흘러나왔다고 한다.
 
공안검사들은 일부 선배들의 잘못으로 인해 공안부 전체가 '정권의 하수인'으로 싸잡아 매도당한다며 억울해한다. 공안통인 현직 검찰 간부는 "공안검사 대부분은 헌법 최고 가치인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겠다는 자세로 일해왔다"며 "일부 잘못된 검사들이 있었지만 그걸 공안검사 전체가 그런 것으로 매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공안 개혁에 대해선 무엇보다 정권의 개입 의지가 없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이 검찰 간부는 "공안 사건은 개인적 법 이익보단 주로 국가적 법 이익을 다루는 사건이 많아 검찰 지휘라인의 통일적인 기준 제시가 필요하다"며 "이 지점에서 정치적 고려 같은 법률적 판단이 아닌 '왜곡된 지시'가 개입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진정한 개혁을 이루려면 단순히 부서 명칭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건 처리에 있어서 '왜곡된 지시'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고 꼬집었다.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 vs "정권의 하수인" 
검찰 공안부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한다'는 목적에 따라 국가 안보와 관련한 대공·테러 사건, 선거와 노동 관련 사건 등을 전담해왔다. 대검 공안부(초대부장 설동훈)가 탄생한 것은 1973년 1월 25일. 그러나 그보다 12년 전인 1961년 4월 발족한 중앙수사국이 공안분야 업무까지 처리했던 만큼 법조계에선 이를 사실상 공안부의 전신으로 보고 있다.
 
공안검사 시초로 꼽히는 故 오제도 변호사. [중앙포토]

공안검사 시초로 꼽히는 故 오제도 변호사. [중앙포토]

물론 중앙수사국 발족 이전에도 공안 업무는 존재했다. 법조계에선 '공안검사'의 시초로 고 오제도 변호사를 꼽는다. 2001년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난 오 변호사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리는 여간첩 김수임을 사건을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이후 간첩 색출에 명성을 떨쳐온 오 변호사는 당시 북한의 저격대상 1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8년엔 북에서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의형제를 맺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까지 주로 대공(對共)사건을 처리하던 검찰 공안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대 이후엔 시국사건이 급증하면서 선거·노동·학원·집회·시위 사건까지 모두 맡게 됐다.
 
정권의 정통성이 확립되지 않았던 이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국민을 독재권력을 대신해 대거 사법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권의 파수꾼'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67년 동백림(東伯林)사건, 1971년 재일동포 모국 유학생 간첩단사건 등이 꼽힌다. 이외에도 권위주의 정권 당시 공안검사들은 국가의 안위보다 정권의 안위를 더 중시하는 '정치검찰'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출세하려면 공안으로 가라"
공안의 전성기는 전두환 정권 이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로 당시 공안부는 검사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던 소위 '끗발 있는' 부서였다. 검찰 최고의 요직으로 꼽히며 주로 동기생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는 엘리트 검사들이 배치됐다. 당시 검찰에선 '출세하려면 공안으로 가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공안통 출신 유력인사들을 꼽는 것은 너무 많아 무의미할 정도다. 비교적 최근인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선 '김기춘-황교안-박한철' 공안 출신 3인방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 새삼 주목받기도 했다.
 
2014년 11월 국무회의를 앞두고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4년 11월 국무회의를 앞두고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중심에 섰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부장-서울지검 공안부장 등 공안통 요직을 모두 거친 뒤 검찰총장-법무부 장관까지 '꽃길'만 걸었던 대표적인 공안통이다. 1974년 공안검사로 재직할 때는 육영수 여사를 피격한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후 유신헌법 제정 과정에도 참가했다.
 
탄핵 정국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최근 자유한국당에 입당한 황교안 전 총리 역시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이다. 대검 공안3과장과 1과장을 거쳐 서울지검 공안2부장과 서울중앙지검 2차장을 역임했다. 국가보안법과 집회·시위법 해설서를 집필한 그를 법조계에선 '미스터 국가보안법'으로 부르기도 한다. 황 전 총리와 사법연수원 13기 동기인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은 일선 검사 시절 특수통으로 활약했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운동이 한창이던 2008년 3월부터 2009년 1월까지 대검 공안부장으로 일했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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