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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백자 표면처럼, 시간의 상처 견뎌낸 것이 가치 있다

구본창 작가가 자신의 분당 스튜디오에서 지금 작업 중인 ‘금’ 연작을 보여주고 있다. 뒤에 걸린 것은 ‘청화백자’ 연작과 ‘금’ 연작. [사진 박상문]

구본창 작가가 자신의 분당 스튜디오에서 지금 작업 중인 ‘금’ 연작을 보여주고 있다. 뒤에 걸린 것은 ‘청화백자’ 연작과 ‘금’ 연작. [사진 박상문]

조선 백자 달항아리, 군복 견장을 담았던 8자 모양 옛날 프랑스 상자, 쓰다 남은 색색의 비누….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손길과 시간의 흔적이 담겨있다는 것, 그래서 모두 동시대 사진 거장 구본창(65)의 작품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요즘 구 작가를 새롭게 사로잡은 피사체를 국제 갤러리의 새 부산 공간에서 열리는 개인전 ‘Koo Bohnchang’(2월 17일까지)에서 볼 수 있다. 2014년 시작해 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이는 ‘청화백자’ 연작과 2004년 시작해 그간 세계적으로 각광 받아온 순백자 연작 ‘Vessel’이 함께 걸려 있다. 또 갤러리 접객실에는 금빛 물체가 어슴푸레 빛나는 소품 사진이 걸려 있는데, 이는 그가 한창 작업 중인 새로운 ‘금’ 연작의 맛보기 작품인 셈이다.
 
새 작업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경기도 분당 작업실로 찾아갔다. 그가 수집하고 종종 피사체로 삼는, 시간과 이야기가 담긴 온갖 잡동사니의 성소이자 작은 박물관이다. “여섯 살 때부터 수집을 시작했다”는 작가의 ‘고물’이자 ‘보물’이 지하부터 3층까지 가득하다. 헐리는 집에서 얻어왔다는 새 머리 모양 함석 지붕장식처럼 멋들어진 현대미술 작품 같은 것도 있지만, 한쪽 벽장에 가지런히 놓인 온갖 빈 상자들처럼 왜 모았는지 선뜻 이해가 안 가는 것들도 있다.
 
아스라하고 청아한 청화백자에 반해
 
‘청화백자’ 연작 중 ‘OM 17’(2014). [뉴시스]

‘청화백자’ 연작 중 ‘OM 17’(2014). [뉴시스]

그러나 그 빈 상자들은 구 작가의 사진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형태의 아름다움, 담고 있던 것의 흔적, 그 사라진 것의 자취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옛 이야기를 조용하면서도 힘 있게 드러낸다. “무엇이 있었다가 빠진 자리를 좋아합니다. 존재와 부재, 채움과 비움, 그와 관련한 시간성, 이런 것들에 늘 관심이 많습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게 있어요.”
 
그의 백자 사진들은 아스라하다. 도자기 특유의 광택도, 그림자도 거의 없어서 물질적·구체적이기보다 영적인 느낌이 강하다. 살짝 흐릿하지만 동시에 미세한 균열과 얼룩은 그대로 보여 켜켜이 쌓인 시간이 느껴진다. 잘 보면 아웃포커스된 부분과 포커스된 부분이 섬세하게 섞여 있다. 어떻게 이런 이미지가 나올까.
 
“까만 천을 뒤집어쓰고 찍는 독일 린호프 사의 대형 카메라를 써서 원하는 부분은 초점을 맞추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초점이 나가게 찍을 수 있어요. 박물관 카탈로그는 모든 부분을 선명하게 찍어야 하지만, 나는 일부러 선명하지 않게, 유약 광택이 강하지 않게, 그러면서 시간의 흔적은 드러나게 찍습니다. 내재된 존재감, 이면의 아름다움이 내 사진을 통해 드러나도록 말이지요. 표면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로 깊이 들어가려고, 그 깊이의 느낌을 내려고 애씁니다. 현대 도예가들이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그 느낌을 당신 사진이 드러낸다’고 말해줬을 때 특히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 작품을 찍어달라는 요청은 거절하고 있어요. 내 사진이 포착하는 사물들은 세월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순백자 ‘Vessel’ 연작 중 ‘HA 05-1’(2005). [사진 국제갤러리]

순백자 ‘Vessel’ 연작 중 ‘HA 05-1’(2005). [사진 국제갤러리]

백자 연작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청화백자 연작을 시작했습니다.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 청화백자 특별전을 보고 나서 관심이 생겼습니다. 아스라하고 청아한 맛이 있어서요. 중국과 일본 청화백자는 진한 푸른 안료 그림으로 꽉 차있고 화려한 반면 조선 청화백자는 푸른 안료 그림이 엷고 성기게 들어간 것이 많습니다. 푸른 안료가 귀하고 비쌌기 때문에 아껴 쓴 것이죠(코발트 안료는 서아시아에서 중국을 통해 수입해야 했다). 그러나 그 결과 독특한 아름다움을 얻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 그림은 정교하고 규격화된 장식 패턴의 느낌이 강한데, 우리는 자유분방한 필치로 그린 회화 느낌입니다. 색조가 엷고 유약으로 반짝거리지 않아 백자 속으로 스며들어간 느낌, 마치 아웃포커스 사진 같은 느낌, 그림 속으로 우리를 부르는 그런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지나쳐버리는 낡은 사물을 찍어온 맥락에 비춰볼 때, ‘금’ 연작은 예외로 느껴지는데.
“이 역시 제 오랜 관심사인 시간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황금이야말로 사람들이 문화권을 막론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귀하게 여긴 것이잖아요. 2015년 호주 출장길에서 금광을 보았고, 강의 때문에 찾아간 페루 리마에서는 잉카 문명을 보면서 우연이 필연으로 연결됐다고 할까. 대체 왜 인간은 그토록 황금에 반하고 소유하고 싶어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다가 페루 황금박물관에 요청해서 거기 유물들을 찍었어요. 이 황금잔은 우리나라 고대 잔과 많이 닮았죠. 동서고금에 걸쳐 금을 귀하게 여기는 것도, 원시시대의 태양 숭배, 그리고 태양을 가장 닮은 광물질 중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금을 귀하게 여긴 원형적 생각을 공유해서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또 그렇게 금을 갈망하고 소유한 사람들은, 임금이 됐든 제사장이 됐든, 지금은 다 사라졌지요. 황금유물 자체가 존재와 부재의 느낌을 줍니다.”
 
정물에 담긴 시간성·역사성 담아내 
 
왜 시간성에 천착하나요.
“내가 살아온 시간이 오늘의 나를 만든다는 것을 강하게 느껴서 그런 것 같습니다. 3남 3녀 중에 차남이었는데, 형은 한국의 장남들이 그렇듯이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또 그 기대에 부응했고(그의 형은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고 구본영씨다), 동생은 동생대로 어리다고 관심 받고, 저는 형의 그림자처럼 살면서 소외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소심한 데다 친구들과 활발하게 사귀는 성격도 아니었어요. 어린 시절, 즐거운 기억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이렇게 힘드나’ 고민하던 기억이 더 많아요. 그 와중에 사소한 물건들에 관심을 갖고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고 교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끌어내게 됐고, 그게 오늘날 내 바탕이 된 것이죠.

억지 모범생으로 지내며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도 들어갔지만, 내가 정말 뭘 잘 할 수 있는지 뭘 원하는지 모르겠으니까 계속 공허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한계에 이르러 독일로 떠나게 됐는데, 거기 가니 내가 좋아하던 모든 게 길거리 사물에, 인쇄물에 있었어요. 그리고 학교(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 들어가서 과제물 한두 개 하니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내 인생이 바뀌었어요. 하지만 그 전에 겪은 일련의 과정 역시 나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 하나하나의 과거, 모든 사물에 숨어있는 과거가 내게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요즘 작품은 정물 사진이 많지만, 영화 포스터도 많이 찍었듯이 인물 사진에도 관심이 많아요. 사람 얼굴에 깃든 역사에 매력을 느끼고 그걸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이창동 영화 ‘시’ 포스터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그는 예술사진과 상업사진 모두에서 성공한 드문 작가다). 교토 어느 절의 벽처럼, 조선 백자 표면처럼, 시간의 상처를 견뎌낸 것들이 값어치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름다운 정물만 찍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하나하나에 담긴 시간성, 역사성을 담아냅니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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