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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이 “운봉 없으면 호남도 없다”던 그곳은 가야의 땅

이훈범의 문명기행 
40여 기의 가아계 고분이 모여있는 전북 남원의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최근 복원된 32호 고분(아래쪽 큰 고분) 외에 지름 20m가 넘는 대형 무덤이 12기나 돼 남원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기문국의 실체를 드러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박종근 기자]

40여 기의 가아계 고분이 모여있는 전북 남원의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최근 복원된 32호 고분(아래쪽 큰 고분) 외에 지름 20m가 넘는 대형 무덤이 12기나 돼 남원 운봉고원에 존재했던 기문국의 실체를 드러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박종근 기자]

“땅의 형세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특출한 모습으로 험준하게 솟아 있다. 동쪽으로 지리산에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유치(柳峙)에 닿으며, 서쪽으로 여원치(女院峙)에 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정령치(鄭嶺峙)를 잡아당기듯 한다. 그 사이 황산(荒山)이 있는데 사면이 산봉우리로 겹겹이 포개어 이어져 있다. 칼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어 두루 둘러보아도 틈을 만날 수 없다. 이른바 별천지 형승(形勝)이라 부를 만하다.”
 
 
중국계인 닭머리 모양 청자 등 쏟아져  
 
조선 영조 때 각 고을의 읍지(邑誌)들을 모아 만든 책 『여지도서(輿地圖書)』 ‘형승’조에 나오는 ‘운봉’ 지역에 대한 설명이다. 가서 보면 정말 그렇다. 전북 남원시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오늘날 여원재(여원치)라 부르는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해발 500m의 고원 분지다. 백두대간의 끝자락, 해발 1000m 넘는 지리산과 소백산 줄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곳에 너른 들판이 평화로이 펼쳐져 있다. 조선 중기의 예언서인 『정감록』이 전국에서 난리를 피해 살기 좋은 열 곳을 일컫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운봉을 꼽은 이유가 한눈에 설명된다.
 
첩첩산중에 있지만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마를 날이 없어 예로부터 농산물 수확이 풍성했다. ‘운봉의 잔칫집에는 아무리 빼 입고 가도 표가 나지 않는다’는 현지 속담이 그 풍요로움을 말해준다. 남원의 대표 음식인 추어탕이 운봉에서 시작됐고, 판소리 동편제의 뿌리가 운봉인 게 다른 데서 기인하지 않는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운봉 없이는 호남도 없다”라고 단언한 데는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런 곳이 삼한시대에 변한(또는 진한)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영토 쟁탈전의 현장으로만 기억되기는 어딘가 허허롭다. 그런 무릉도원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닐진대 말이다. 다행히도 상상력의 한계를 채워줄 고고학적 성과들이 최근 무성하게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남원 월산리 고분군이다. 영호남 화합을 목적으로 계획된 88올림픽 고속도로 공사에 앞서 1982년 1차 발굴 조사가 실시돼 처음에는 마한과 백제의 무덤일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연구 결과 무덤이 가야계로 밝혀지면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동안 경남권으로 한정됐던 가야의 활동 영역이 전북 북동부지역으로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고속도로 공사 때문에 서둘러 발굴한 것이었지만, 어쩌면 고속도로 건설 취지에 제대로 부합하는 유물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주민주화항쟁을 초래하고 무력 진압한 원죄(原罪) 탓에 88고속도로의 첫 개통식을 전남 담양에서 하고, 영호남간 부부의 연을 맺은 8쌍의 합동결혼식을 지리산 휴게소에서 치르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한 5공 정권이 이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 역사적 의미에 무지했거나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고, 당시 주류 고고학계에서 새로운 발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놓쳤을 수도 있다.
 
가야 사라지고 ‘슬픈 추억’ 모데미풀만 …
 
운봉고원에서 일본 식물학자에 의해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 모데미 마을에서 발견돼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모데미는 무덤의 일본식 발음이다. [중앙포토]

운봉고원에서 일본 식물학자에 의해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 모데미 마을에서 발견돼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모데미는 무덤의 일본식 발음이다. [중앙포토]

그래선지 2차 발굴은 2010년에야 이뤄졌는데 고속도로 바로 옆에 붙은 M5호 고분에서 놀랍게도 중국계인 닭머리 모양 청자(鷄首壺)와 쇠자루솥, 기꽂이, 투구, 갑옷 등이 쏟아져 나왔다. 닭머리 모양 청자와 쇠자루솥은 거의 왕릉 급 무덤에서만 출토되는 것인지라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닭머리 모양 청자는 익산 입점리와 공주 수촌리, 천안 용정리 등 백제 영역에서만 나오던 것이었다. 당시 백제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잇템(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귀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런 물건이 가야 특유의 철제 투구, 갑옷과 함께 발견된 것은 이 무덤이 가야계인 운봉 지역 실력자의 무덤이며, 그들이 중국과 독자적 외교를 할 만큼의 세력을 갖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증거인 것이다.
 
그 세력이 ‘기문국’이라는 독립된 가야계 소국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기문이라는 이름은 『일본서기』 계체천황 7년(513년) 6월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백제 사신이) ‘반파국이 신의 나라에 있는 기문(己汶) 땅을 약탈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르게 판단해 원래 속한 곳에 돌려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반파는 과거에는 후기 가야연맹을 이끌던 대가야 즉, 고령의 가라국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전북 장수에 기반을 뒀던 가야 소국 중 하나라는 주장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중앙SUNDAY 1월 5일자 참조) 기문국 역시 섬진강 유역이라는 설과 낙동강 유역이라는 주장이 맞서왔지만 최근에는 섬진강 유역, 즉 남원 일대로 기울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지리서인 『한원(翰苑)』 ‘백제’전에 ‘기문하(基汶河)’에 대한 기술이 나오는데, “나라(백제)의 남쪽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섬진강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기문이 자기 영토라는 백제의 주장은  
 
6세기 초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을 의미하며, 이에 반파국 등 후기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위기를 느끼고 백제에 대항하는 과정이 『일본서기』에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계체천황 10년(516) 9월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백제가 주리즉차(州利卽次) 장군을 (일본 장수) 물부련에게 딸려 보내어 기문의 땅을 준 것에 감사했다.”
 
끝내 기문국이 백제-일본 연합군에 멸망해 백제에 복속되고 만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문국이 부흥기의 백제조차 일본의 힘을 빌지 않고는 차지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역시 그 힘은 철에서 비롯된다. 운봉고원에서만 지금까지 확인된 제철 유적이 33개소에 이른다. 이를 바탕으로 180여 기의 고분을 남겼다. 특히 유곡리-두락리에는 40여 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어 사적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오랫동안 방치되는 바람에 무심한 소나무들이 자라나 봉분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운 모습이 돼버렸고, 후대가 발복(發福)을 바라며 겹쳐 묘를 쓰기도 했지만 그동안 뒤쳐졌던 전북 가야의 실체를 되찾는 마중물이 될 게 분명하다. 2013년 발굴된 32호분에서는 이미 왕릉급 청동거울과 금동신발이 나와 학계를 흥분시키기도 했다.
 
운봉에는 또 하나의 상징이 있다. 운봉금매화라고도 불리는 ‘모데미풀’이다. 고산지역 습한 곳에 자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꽃인데 1935년 일본 식물학자 오이 지사부로(大井次三郞)가 운봉면 모데미 마을에서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모데미란 마을은 운봉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데미란 무덤의 일본식 발음이었고, 결국 운봉 무덤마을이었던 것이다. 가야는 사라지고 무덤만 남았으니 들어맞는 이름이기도 하다. 마침 모데미풀의 꽃말이 ‘슬픈 추억’이어서 더욱 그렇다. 
 
부안의 가야포, 대중국 거점포구였을 가능성
가야가 전북에도 존재했다면 가야의 활동범위는 어디까지 미쳤을까. 중국의 정사인 『남제서』 동남이열전 가라국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가라국(加羅國)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에 조서를 내려 이르되, ‘널리 헤아려 비로소 조정에 올라오니 멀리 있는 오랑캐(夷)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을 제수함이 합당하리라.”
 
고령 대가야인 가라국이 중국 남조시대의 두 번째 왕조인 남제와 직접 통교한 것이다. 이는 고구려·백제·신라와 더불어 가야가 한반도의 유력한 정치세력으로서 위상을 과시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가라국 사신이 중국을 왕래할 때 예전에는 섬진강을 따라 하동까지 내려온 뒤 남해와 서해 연안 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세였다.
 
이 경우 서해안의 전북 부안 죽막동에서 해신에 제를 올린 뒤 출항을 하게 된다. 죽막동은 삼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으로 출항하는 서해안 기항지였다. 그러나 죽막동에서 대가야 양식의 토기는 물론 장수나 운봉 가야의 토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김해 금관가야의 토기만 출토됐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가야 계통의 가야국들은 죽막동을 거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조선 철종 때 제작된 전국지도인‘동여도’에 가야포(加耶浦)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책 『대동지지』에도 가야포가 나온다. 죽막동에서 위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동진강 하구로 행정구역상 전북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창북리 일대다. 고령과 비슷한 위도의 이곳이 고령에서 최단거리인 대중국 거점포구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일제 때 농경지로 바뀌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계화면 일대의 지표조사에서 가야계 밀집파상문 토기편이 발견돼 그 가능성을 높였다. 가야포가 가야의 영토는 아니더라도 중국의 신라방(新羅坊)처럼 대가야의 통상외교 전초기지였을 것이라는 게 군산대 곽장근 교수 같은 이들의 생각이다. 곽 교수는 “가야포로 추정되는 지역의 발굴조사를 통해 대가야의 해상교통로 추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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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