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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하게 입고 외진 데 피해야"…말레이시아 성교육 교과서 논란

 “얌전한 옷을 밀폐된 곳에서 갈아입고 인적이 드문 곳은 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수치스러운 일을 겪고 가족, 친구들에게 외면받게 됩니다.”
 
트위터에 공개된 말레이시아 교과서의 성교육 삽화 내용. [트위터 캡처]

트위터에 공개된 말레이시아 교과서의 성교육 삽화 내용. [트위터 캡처]

 
 말레이시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성교육 삽화 한 장이 큰 논란에 휩싸였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내용을 정부가 버젓이 출판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16일(이하 현지시간) 문제의 삽화 내용을 집중 보도했다. 삽화에는 ‘아미라’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교과서는 ‘아미라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따를 세 가지 법칙’을 제시한다. ▶노출 없는 얌전한 옷 입기 ▶문이 닫힌 곳에서 옷 갈아입기 ▶인적이 드문 장소는 피해다니기 등이다.  
 
 이어 이 법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아미라가 겪게 될 고난을 경고한다. ▶수치심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친구들에게 외면받아 왕따가 되며 ▶가족에게 부끄러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9세 아동을 대상으로 출판된 이 교과서는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교육자료로 쓰이고 있다고 BBC는 전했다.
 
 해당 교과서 내용이 트위터를 비롯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지자 삽화 내용과 이를 출판하도록 한 말레이시아 정부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 여성단체 ‘여성구호기구(Women‘s Aid Organisation)’의 류렌청 법률매니저는 “이 삽화는 성폭력의 책임이 가해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폭행과 성추행을 피해야 할 의무를 여자아이들에게 지움으로써 잘못된 성관념을 심어준다는 게 류 매니저의 주장이다. 여성이 얌전하지 않아서, 혹은 부주의해서 성폭력에 노출됐다는 전형적인 ‘피해자 책임론’을 고스란히 교과서에 반영해선 안된다는 비판이다.
 
 앞서 14일 이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아줄 모하드 칼립(@Azrul Mohd Khalib)’의 게시물은 '좋아요'를 750개 이상 받으며 사흘 새 1400번 넘게 공유(리트윗)됐다. 논란이 확산되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직접 해명에 나섰다.
 
 테오니칭 말레이시아 교육부(副)장관은 “해당 삽화는 교육부의 내용 적정성 검열 과정에서 벌어진 실수의 결과”라면서 “성교육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여전히 낮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해당 교과서는 아직 회수되지 않은 상태다. 말레이시아 교육부는 문제의 삽화 위에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말레이시아 여성단체가 여아 조혼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당시 41세 남성과 11세 소녀의 결혼이 알려지면서 여권 신장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EPA]

지난해 11월 말레이시아 여성단체가 여아 조혼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당시 41세 남성과 11세 소녀의 결혼이 알려지면서 여권 신장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EPA]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는 성에 대한 공개 담론이 철저히 금지돼있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해 성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종종 사회적 비난을 받는다. 영국 작가가 쓴 44쪽 분량의 성교육 서적 ‘나는 어디서 왔을까’(1984년 발간본)가 문제가 돼 지난 2012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은 일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 책은 성, 임신, 출생 등과 같은 주제를 아이들 눈높이에서 일러스트를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내무부는 “도덕적 가치를 위협하고 일반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며 “만일 이 책을 판매하다 적발되면 최대 3년까지 옥살이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판매금지가 내려진 영국 작가의 성교육 도서.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판매금지가 내려진 영국 작가의 성교육 도서.

 
 동성애도 금지돼있다. 지난해 9월 차 안에서 동성 성행위를 시도했다가 검거된 말레이시아 여성 2명이 이슬람법 위반 혐의로 15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태형을 받았다. 각각 등 부위를 6대씩 채찍으로 맞아 당시 여성인권단체들의 큰 반발이 나왔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말레이시아 교육과정 내 성교육 도입에 대한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교과서 저자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집필하도록 돼 있다. 통상 현직 교사나 강사, 교수 등이 집필진에 참여한다. 
 
 말레이시아 ‘학부모 행동회’ 회장인 누어 아지마 압둘 라힘은 “다소 과하긴 하지만 ‘성교육이 곧 성행위로 연결된다’는 우려가 말레이시아 교육과정 내 성교육 부재를 가져오고 있다”면서 “아동 심리학자들의 감수 아래 좀 더 온건한 형태의 성교육 자료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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