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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춘풍추상 불감(不感)

김승현 정치팀 차장

김승현 정치팀 차장

중국 명나라 말기에 쓰인 『채근담(菜根譚)』은 지혜의 고전이다. ‘채근’은 먹을 수 있는 채소의 뿌리인데 비유적으로 ‘거칠고 보잘 것없는 음식’을 의미한다. 책 이름은 송나라의 학자 왕신민의 경구에서 유래했다. ‘인상능교채근 즉 백사가성(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을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다).’ 삶의 진리나 깨달음은 나물의 깊고 담담한 맛처럼 소박하고 단순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책의 내용은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앞다퉈 인용했다.
 
지난 8일 임명된 노영민 신임 대통령비서실장이 언급한 ‘춘풍추상(春風秋霜)’도 그중 하나다. 노 실장은 “청와대 내에 ‘춘풍추상’이라는 글이 다 걸려 있는 것을 봤다. 비서실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이 되새겨야 할 사자성어라고 생각하며 실장이 됐든 수석이 됐든 비서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청와대 비서관실마다 걸린 액자는 지난해 2월 문재인 대통령이 선물했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대하되, 자신에겐 가을 서리처럼 차갑고 엄격해야 한다’는 뜻으로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을 줄인 표현이다. 공직자의 자세를 강조하는 이 말은 문무일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에서는 그의 좌우명으로 소개됐다. 역대 검찰 간부들이 이·취임사에서 즐겨 쓰던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5년 전 청와대에서도 등장했다. 박근혜 정부 2년 차이던 2014년 4월,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은 청와대 직원의 비위 문제와 관련해 “사안의 대소경중을 불문하고 엄단해 기강을 확립할 것이며, ‘대인춘풍지기추상’의 마음으로 청와대 기강을 먼저 바로 세워야 각 부처의 기강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약간의 변화를 가미한 비슷한 말을 했다. “스스로에게는 더욱 엄하고 국민께는 더 낮게 다가가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자세로 사심 없는 개혁을 이끌겠다”면서다.
 
국민에겐 봄바람처럼 너그럽고 후하게, 공직자 스스로에겐 박하고 추상같이 임한다는 다짐은 그러나 공허하기만 하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다. ‘봄바람’은 황사와 미세먼지가 낀 듯 찝찝하고, 추상같은 ‘가을 서리’보다는 ‘내로남불’이 더 익숙하다. 지구 온난화를 핑계로 댈 텐가(국립기상과학원에 따르면 최근 30년간 연평균 서리 일수가 25.7일이 줄어 69.4일이었다). 말만 옮긴다고 채근을 씹던 선현의 지혜가 구현되는 건 아니다.
 
김승현 정치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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