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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1·4 후퇴'…전쟁을 끝내지 못한 이유 믿기 힘들어

Focus 인사이드-남도현 
 
너무 쉽게 포기한 평양이다.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 대열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북진하던 국군과 연합군을 막아 전선을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왔던 중공군은 1951년 5월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강원도 인제와 홍천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중앙포토]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 대열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북진하던 국군과 연합군을 막아 전선을 경기도까지 밀고 내려왔던 중공군은 1951년 5월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강원도 인제와 홍천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중앙포토]

 
1950년 10월 25일 등장한 중공군 기습(제1차 공세)으로 국군 6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이 곤혹을 치렀다. 이후 전선은 급속도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 때문에 유엔군은 중공군이 전쟁의 향방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으로 오판했다. 
 
그러나 이들은 공세 종말 점에 다다른 상태여서 보급을 하며 부대를 재편하던 있었다. 군수 능력 때문에 불과 일주일 정도만 공세를 지속할 수 있다는 중공군 약점인데 아군은 석 달이나 지난 뒤 알게 됐다.
 
한국전쟁 개전 사흘만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유엔총사령관이 한국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일본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한국으로 이동하는 기내 모습이다. 맥아더는 한국에 도착한 뒤 최전선인 시흥 일대를 둘러봤다.[중앙포토]

한국전쟁 개전 사흘만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유엔총사령관이 한국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일본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한국으로 이동하는 기내 모습이다. 맥아더는 한국에 도착한 뒤 최전선인 시흥 일대를 둘러봤다.[중앙포토]

 
이때 의외의 손실을 본 맥아더는 그해 말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고 즉시 반격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11월 24일, 청천강 일대에 도열해 있던 유엔군은 ‘크리스마스 공세’로 명명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중공군은 엄청난 역습을 시작했다. 이른바 ‘제2차 공세’였다. 전선 중앙부를 담당하던 국군 7사단, 8사단이 순식간 궤멸하면서 유엔군 부대들은 다시 청천강으로 물러나야 했다.
 
중공군 1차 공세에 따른 연한군 공격로와 중공군 공격로 [중앙포토]

중공군 1차 공세에 따른 연한군 공격로와 중공군 공격로 [중앙포토]

 
놀란 맥아더는 11월 28일, 전선 책임자들을 도쿄로 긴급 소환해 현황 파악에 들어갔다.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평양을 계속 확보할 수 있다고 봤고, 동부전선을 책임진 미 10군단장 알몬드는 예하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을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할 수 있다고 보고 했다. 
 
이런 낙관적인 보고에 맥아더는 적어도 평양을 정점으로 하는 선에서 중공군 남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3일 후인 12월 1일, 미 2사단이 평안남도 개천시 군우리에서 부대 해체와 맞먹는 피해를 입고 붕괴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중공군 2차 공세에 따른 아군 퇴각로(붉은 화살선)와 중공군 공격로(파란 화살선) [중앙포토]

중공군 2차 공세에 따른 아군 퇴각로(붉은 화살선)와 중공군 공격로(파란 화살선) [중앙포토]

 
12월 3일, 중공군이 평안남도 성천군을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워커는 평양 일대에 집결한 미 8군 주력이 일거에 포위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그는 맥아더에게 평양을 포기하겠다고 보고했다. 말이 보고였지 예하부대들은 이미 평양에서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이들 옆에는 수십만 피난민도 함께했다. 그들은 엄동설한에 아이를 앉고 업고 줄지어 남쪽으로 향했고, 갈수록 피난민 규모는 점점 커졌다. 불과 일주일 전에 장담하던 평양 사수 의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엔군이 후퇴하자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 피난길에 오르는 평양시민들. 통일 꿈이 좌절된 모습을 담은 유명한 사진이다. [중앙포토]

유엔군이 후퇴하자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 피난길에 오르는 평양시민들. 통일 꿈이 좌절된 모습을 담은 유명한 사진이다. [중앙포토]

 
말이 후퇴였지 약 15만 명 미 8군이 평양에서 약 200㎞ 떨어진 38선까지 불과 20일 만에 내려왔을 만큼 신속했던 도주였다. 기동 장비가 낙후된 중공군이 추격할 수 없었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워커는 현 단계에서 미 8군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중공군과 접촉 단절 뿐이라고 극히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유리한 위치에서 방어선을 재구축하거나 부대를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단지 중공군과 싸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좌)은 어려웠던 낙동강 방어선을 뚝심 있게 지켜낸 인물이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부터 예상외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고 평양을 쉽게 포기하는 아쉬운 결정을 했다. [wikimedia.org]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좌)은 어려웠던 낙동강 방어선을 뚝심 있게 지켜낸 인물이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부터 예상외로 위축된 모습을 보였고 평양을 쉽게 포기하는 아쉬운 결정을 했다. [wikimedia.org]

 
믿기 힘들지만 서부전선에서는 울프하운드 작전을 실시 한 1951년 1월 15일까지, 한 달 이상 제대로 된 교전이 없었다. 그만큼 중공군을 겁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중공군 입장은 전혀 달랐다. 유엔군이 ‘평양-원산’과 인접한 선에서 강력한 저항에 나선다고 예상한 마오쩌둥이 ‘숙천-순천’ 선에서 일단 숨을 고르고 부대를 재정비한 후 평양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중앙포토]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중앙포토]

 
공세 시작 일주일 후인 12월 1일경에 이르러 중공군은 모든 물자가 바닥나 탈진한 상태였다. 이때 미 8군이 평양 북방에 진지를 구축하고 해ㆍ공군 지원을 받아 강력히 저항했다면 1ㆍ4 후퇴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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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중공군이 지쳐서 공격을 멈추려 했을 때 정작 유엔군은 단지 놀라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미련 없이 평양을 포기하고 38선으로 다시 내려오고 난 후 전쟁은 한반도 중앙에서만 전개됐다. 
 
어렵게 수복한 한반도 최고(最古) 도시를 이처럼 쉽게 포기했으니 어쩌면 다시 찾겠다는 생각은 평양을 떠난 순간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못내 아쉬운 순간이었다.

 
남도현 군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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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