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현상금 58억’ 김구 필사탈출…그뒤엔 美·中 인사 비밀합작

임시정부 100년 ③ 임정 루트를 가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탈출한 뒤 저장성 자싱에 은거하던 시절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 사진. 중국식 옷차림이 이채롭다. 뒷줄 오른쪽 셋째가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장 김구. 다섯째가 임정 주석을 지낸 이동녕.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탈출한 뒤 저장성 자싱에 은거하던 시절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 사진. 중국식 옷차림이 이채롭다. 뒷줄 오른쪽 셋째가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장 김구. 다섯째가 임정 주석을 지낸 이동녕.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중국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시 메이완(梅灣)가 76호. ‘김구 피난처(金九避難處)’란 표지판이 붙어 있다. 다시 봐도 ‘임시정부 피난처’가 아니라 ‘김구 피난처’였다. 자싱의 첫인상은 평온했다. 하지만 김구의 상하이 탈출은 한 개인의 목숨을 넘어 임정의 미래와 존망이 걸린 사활적 문제였다.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는 윤봉길 의거(1932년 4월 29일)가 발생한 바로 다음날 프랑스 조계(租界)의 대한교민단 임정 사무소를 급습해 모든 문서와 물품을 탈취했다. 당시 신문보도를 보자.
 
‘안창호가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프랑스 조계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대로 어제 새벽 2시 30분경 프랑스 조계 당국의 협조를 얻은 일본 영사관은 12대의 차량에 분승한 수십 명의 사복경찰을 파견해 대대적인 한인 검거에 나섰다.’
 
김구 은신처의 비상 탈출문.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김구 은신처의 비상 탈출문.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관련기사
윤봉길 의거 여파로 프랑스 조계도 더는 안전하지 못했다. 5월 8일 김구는 “한인애국단은 내 손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단원들은 모두 애국지사들”이라고 선언했다. 일본은 김구에게 현상금 20만 위안을 걸었다. 일본 외무성, 조선 총독부, 상하이 주둔군 사령부가 연합해 60만 위안으로 현상금을 대폭 올렸다. 1930년대에 1위안이 지금의 약 60위안이니 지금 환율로 치면 약 58억원이나 된다.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 아파트를 몇 채나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김구의 상하이 탈출과 저장성 자싱 은거를 도운 미국인 조지 애슈모어 피치(왼쪽)와 중국인 주푸청.

김구의 상하이 탈출과 저장성 자싱 은거를 도운 미국인 조지 애슈모어 피치(왼쪽)와 중국인 주푸청.

상하이에서 자싱까지 김구를 피난시키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기여했다. 첫째는 미국인 조지 애슈모어 피치(1883~1979) 부부였다. 피치는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엄항섭·안공근·김철을 자신의 집에 숨겼다가 일본 경찰에 노출되자 부인 제럴딘과 김구를 부부로 위장시켜 차에 태운 뒤 자신이 운전해 김구를 자싱까지 피난시켰다.
 
또 한 사람은 중국인 주푸청(褚輔成·1873~1948)이었다. 그는 고향 자싱에 있던 장남 주펑장(褚鳳章)에게 김구를 보내고 은신처를 제공했다. 주펑장은 우룽교(五龍橋) 남쪽의 실 만드는 슈룬사(秀綸紗) 공장에 김구를 숨겨줬다.
 
미국인 피치와 중국인 주푸청이 릴레이로 ‘미·중 합동 작전’ 하듯 상하이에서 자싱의 은신처까지 김구를 탈출시킨 셈이다. 지금은 미·중이 무역 전쟁으로 날을 세우고 있지만, 당시에는 미·중 양국 인사들이 김구와 임정의 불씨를 살린 셈이다.
 
피치의 부친은 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 인물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피치는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 경찰의 한국인 불법체포와 검문에 항의하는 서한을 프랑스 조계 지역 언론과 경찰에 보냈다. 1937년 일본의 난징(南京) 대학살 때는 난징의 외국인들과 국제위원회를 조직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고발했다. 1940년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정을 승인하도록 도왔다.
 
김구와 중국인 ‘가짜 아내’가 타던 우펑촨(烏蓬船) 배 모형.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김구와 중국인 ‘가짜 아내’가 타던 우펑촨(烏蓬船) 배 모형.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주푸청은 중·일 전쟁 시기에 국민정부의 최고 국책자문 기관이었던 국민참정회에서 참정원으로 활동한 명망가였다. 상하이 법학원장(대학장), 저장성 정부 임시주석 겸 민정국장을 지낸 인사였다. 윤봉길 의거가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주푸청도 위험을 감수하며 김구의 탈출을 도운 것이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주푸청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김구는 그 후 천퉁성(陳桐生)의 집으로 옮기고 ‘광둥(廣東) 사람 장씨’ 행세를 했다. 당시 자싱 사람들은 외국어처럼 다른 광둥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왕미나(王咪娜) 해설사는 김구 피난처 앞에서 “이 문은 김구 선생이 호수에 드나들던 비밀통로”라며 작은 문을 열었다. 일본 경찰이 김구 피난처를 급습하자 주푸청은 며느리의 친정인 저장성 하이옌(海鹽)으로 김구를 피신시킨다. 김구는 하이옌에서 반년을 보내다 자싱으로 돌아왔다. 주푸청은 김구를 보호하기 위해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와 부부로 위장시켜 일경이 순찰할 때마다 배 위에 덮개를 덮고 지내도록 했다.
 
“김구 선생의 거처는 임정 가족들에게도 비밀이었다”는 설명대로 생사를 건 도피 생활의 연속이었다. 김구는 주아이바오와 함께 난징에서도 광둥 출신 골동품상 부부로 위장해 피난생활을 계속했다. 1938년 난징이 일본에 함락되자 김구는 후난(湖南)성 창사(長沙)로 가면서 주아이바오를 잠시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두 사람은 그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난리 통에 벌어진 ‘가짜 부부’의 안타까운 생이별이었다.
 
임정 루트를 가다

임정 루트를 가다

1989년 여름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은 자싱을 방문해 김구 피난처를 확인했고, 1999년 김신의 주선으로 자싱시와 한국 강릉시가 자매도시가 됐다.
 
항저우 임시의정원 유적지를 찾아갔다. 추이란(崔蘭) 부관장은 “중국인들은 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살다 광저우(廣州)에서 먹고 류저우(柳州)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이 있다”며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다. 쑤저우는 옷감이 풍부해서 태어날 때 좋고, 항저우는 수려한 곳이라 삶을 즐길 만하고, 광저우는 먹을 게 많고, 류저우는 큰 나무가 많아 죽을 때 좋은 관을 짤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라 잃은 임정 요인들의 항저우 피난살이는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1932년 5월 임시의정원이 항저우로 이동해 오자 김구·이동녕 외에 조소앙·이시영·안공근·안경근 등도 항저우로 모여들었다. 34년 11월 26일 밤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 참석자들의 복장은 피난 중이라 한복·양복과 중국식 의복이 섞여 마치 ‘다국적 행사’ 같았다. 추이란 부관장은 “1932년부터 3년 6개월 동안 항저우 시기에 임정의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매우 심했다. 항저우 시기 임시의정원은 송병조(의정원 의장 겸임)·김철·양기탁 등 세 분이 갖은 고초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항저우 임정 유적지 앞에 선 문영숙 작가. [사진 문영숙 작가]

항저우 임정 유적지 앞에 선 문영숙 작가. [사진 문영숙 작가]

한·중 청춘원정대 소속 대학생 팀이 자싱·하이옌을 거쳐 항저우로 왔다. 추이란 부관장이 안중근과 김구에 대한 현장 특강을 동행한 김월배 하얼빈이공대 교수에게 부탁했다. 안중근 유해 찾기를 계속해온 김 교수는 안중근과 김구의 특별한 인연을 다음 네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김구와 안중근은 고능선을 스승으로 모신 동문 관계다. 둘째, 김구의 장남 김인과 안정근(안중근의 동생)의 딸 안미생이 결혼해 안중근과 김구는 사돈지간이다. 셋째, 김구 한인애국단장과 안중근 동생 안공근이 동지 관계다. 넷째, 해방 후인 46년 7월 김구는 일본에서 활동한 의열단원 박열에게 지시해 일본에 있던 윤봉길·백정기·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찾아 서울 효창원에 모실 때 안중근 의사의 허묘(墟墓)부터 만든 인연이 있다. 특히 김구는 1948년 4월 남북협상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에게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제안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답사를 마치면서 항저우 임시의정원을 관리하는 뤼단(呂旦) 관장에게 한국에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사람들은 편안하고 행복했던 기억보다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항저우 사람들은 중국과 한국이 100년 전에도, 100년 후에도 친밀한 관계로 지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영숙
1953년 충남 서산 출생.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독립운동가 최재형』 『카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광부』 등을 집필해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로 불린다. ‘문학동네 문학상’ 등을 받았다.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항저우·자싱=문영숙 작가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