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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고 9년, 상하이 모인 29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

임시정부 100년 ② 임정 루트를 가다
1919년 9월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3개 임시정부가 통합해 출범한 상하이 임정은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상하이 마당로 임정 옛 청사는 살아 있는 독립운동 교육의 현장이다.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1919년 9월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3개 임시정부가 통합해 출범한 상하이 임정은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상하이 마당로 임정 옛 청사는 살아 있는 독립운동 교육의 현장이다. [사진 상하이총영사관]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서 중국 상하이로 가는 길은 고행(苦行) 그 자체였다. 기차와 배로 빨리 가야 사나흘, 여의치 않으면 한 달이 넘었던 길이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당초 입주한 곳은 상하이의 대표 관광지인 신톈디(新天地)에 자리한 루이안(瑞安) 광장 앞마당이었다. 여기서 600m 남쪽으로 가면 마당로(馬當路) 306-4호가 나온다. 1926~32년에 임정 청사로 쓰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舊址·옛터)다. 옛 프랑스 조계(租界)에 속했던 곳이다. 청사 관리처 연구실 야오팅팅(姚婷婷) 부주임이 기다렸다는 듯이 “어서 오세요”라며 유창한 한국어로 반겼다.
 
야오 부주임은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1842년 패배하면서 강제로 서구 열강에 개항했는데 영국과 미국은 공동조계지였고 프랑스 조계지는 따로 있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상하이는 58개 국적의 외국인이 거주하는 국제도시였다. 영국이 일본과 영·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프랑스 조계지가 안전했다.
 
“두 번째 방문이에요. 다른 곳은 안 가더라도 여긴 꼭 들릅니다. 임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분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중국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잖아요.”
 
청사 전시관에서 만난 한국인 관람객의 말에 가슴이 찡했다.
 
상하이

상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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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상하이에 모인 국내파와 해외파가 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이동녕·신규식·조소앙·여운형 등이 중심이 돼 임정 수립 방안을 논의했다. 상하이에 본부를 두기로 한 것은 외교를 우선한 때문이었다. 임시의정원 첫 회의는 4월 10일과 11일 프랑스 조계 진선푸로(金神父路) 2층 양옥에서 개최됐다.  
 
참석자는 각 지역 대표 29명. 이동녕(1869~1940)과 손정도를 의장과 부의장에 선출했다.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심의를 거쳐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임시헌법) 전문과 10개 조를 채택했다. 이때 처음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고, 임시헌법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라고 명시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지 9년 만에 군주제에서 벗어나 백성이 주인인 민주 공화제를 만천하에 천명했다.
 
임시헌법은 제3조에 남녀 귀천과 빈부 계급이 없는 일체 평등을 명기했다.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각료로 임명하고 13일에 이를 공포했다.
 
임정의 시급한 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부로서 방향과 목표가 뚜렷해야 했다. 둘째, 국내·만주·시베리아·중국·미주 등지에 분산된 민족운동단체와 세력을 상하이 임정에 끌어들여 통제해야 했다. 셋째, 임정 유지에 필요한 재정 마련이 절박했다.
 
노령(露領, 러시아 땅)과 상하이·한성(서울) 등 처음엔 3개로 따로 출범한 임정의 구성원은 대부분 중복됐다.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를 이동휘가 맡아 정통성이 높았다. 하지만 9월 11일 세 임정의 통합 때는 해외 활동파들이 중심이 된 상하이 정부 안이 중심이 됐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President(대통령)’라고 쓴 명함을 사용했다. 상하이 임정의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Prime Minister’(총리)로 정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해방 후에도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 집착하다 결국 하야했다.
 
1919년 9월 1일 세 개의 임정이 통합된 뒤 임정 내부는 갈등도 적지 않았다. 이동휘는 측근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보내 60만 루블을 받아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보관하고, 40만 루블은 내놓지 않았다.
 
이승만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이 낸 애국 성금 중 13%만 상하이로 보내고 본인은 상하이에 가지도 않았다. 이승만이 위임통치 건의안을 미국에 제출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고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는다”며 격분했다. 크고 작은 불화로 급기야 1925년 이승만이 탄핵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임정은 게다가 인물난과 재정난 등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내각제 형태로 바뀐 정부에서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1876~1949)는 침체한 임정에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한인 애국단을 조직했다.
 
김구가 애국단을 통해 거사를 성공시킨 루쉰(魯迅)공원을 찾아갔다. 입구 표지판 아래를 보니 역사책에서 배운 대로 ‘옛 훙커우(虹口) 공원’이라고 씌어 있었다. 우강(吳剛) 루쉰공원 원장이 훙커우 축구장 앞으로 안내했다.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상하이 사변 승리를 축하하고 일왕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훙커우 공원에서 열었다. 우강 원장이 잔디밭 위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저쪽입니다. 저곳이 바로 기념식 단상이 있던 자리예요.”
 
당시 기념식장에는 도시락과 물통, 그리고 일장기만 반입이 허용됐다. 일설에는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의 비서이자 나중에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도 활약한 이화림(1905~1999)과 부부로 위장해 입장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마지막에 계획을 변경해 도시락 폭탄과 물병 폭탄을 들고 혼자 행사장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다.
 
장제스가 윤봉길 의거를 극찬하며 쓴 휘호로 ‘장렬한 의거가 영원하라’는 뜻을 담았다(윤의사 조카 윤주 제공).

장제스가 윤봉길 의거를 극찬하며 쓴 휘호로 ‘장렬한 의거가 영원하라’는 뜻을 담았다(윤의사 조카 윤주 제공).

단상을 향해 물병 폭탄을 던진 후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이날 의거로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가 즉사했다. 평소 “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윤봉길 의사는 실천으로 자신의 말을 지켰다. 의거의 반향은 엄청났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이루지 못한 것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극찬하고 이후 국민당 정부가 상하이 임정을 지원하도록 조치했다. 실로 윤봉길 의거가 임정에 일대 전환점을 만든 셈이었다.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전시관이 있는 곳은 원래 매원(梅園)이라 불렸다. 의거 자리에 만든 정자는 당초 매정(梅亭)이라 부르다 유족의 유족이 수정을 요구하자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라 지금의 매헌(梅軒)으로 고쳤다. 엄동설한을 이겨낸 매화처럼 곧은 절개를 지녔던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을 임정 100주년을 맞은 이번 봄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많은 중국인이 방문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이 푸단대 교수에 따르면 상하이 임정 주요 지도자의 유해가 모셔졌던 곳은 훙차오(虹橋) 만국공묘였다고 한다.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 여사의 능에 있던 박은식·신규식·노백린 등 7명의 유골은 1993년 국내로 봉안했다.
 
임정 청사를 방문한 문영숙 작가.

임정 청사를 방문한 문영숙 작가.

“안중근 의사뿐 아니라 모친 조마리아 여사, 부인 김아려,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병사한 안중근 의사의 큰아들 유골도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러시아·중국 곳곳에 무연고 유골로 흩어져 구천을 떠돌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이 묻힌 곳이라도 빨리 조사해야 한다. 그래야 후손된 도리 아니겠나.”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에 전념해온 김월배 하얼빈이공대 교수의 말이 가슴을 쳤다. 
 
◆문영숙
1953년 충남 서산 출생.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독립운동가 최재형』 『카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광부』 등을 집필해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로 불린다. ‘문학동네 문학상’ 등을 받았다.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상하이=문영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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