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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몰살 실화를 소설로

[책 속으로] 열린책들's pick
적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윤정임 옮김
 
‘1993년 1월 9일 토요일 아침, 장클로드 로망이 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있는 동안, 나는 아내와 함께 큰아들 가브리엘의 유치원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것은 실화다. 세계보건기구(WHO) 연구원 로망이 그날 마지막으로 한 일은 자살 기도였다. 자살은 실패한다. 그가 경찰에 넘겨진 후 주변인들이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드러난다. 세계보건기구에는 그런 사람이 근무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의사도 아니었다. 의대를 다니기는 했었다. 3학년 때 그는 시험장에 나가지 않았고, ‘떨어졌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합격한 체했다. 존비속 몰살로 끝나는 가짜 인생의 시작이었다.
 
제목인 ‘적(adversary)’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적대자, 즉 악마를 뜻한다. 악마의 근본적인 의미는 ‘거짓말하는 자’이다. 실로 적절한 제목이지만, 어쩌면 ‘악마’나 ‘사탄’처럼 선정적이고 명확한 제목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어판은 초판(2005)이 소진되는 데 6년이 걸렸고, 2쇄는 6년 뒤에도 대부분 창고에 남아 있었다. 2017년, 소설가 김영하가 『적』을 신임 대통령에게 추천하면서 책의 운명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카레르는 소설 집필 중 교도소의 로망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뜻밖에 로망이 승낙한다. 이렇게 해서 작가는 모든 유혈 행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언제나 겁 많고 나약한 개인으로 묘사할 준비가 된 무적(無敵)의 인격을 만난다. 아니, 그건 인격이라기보다는 두려운 공백, 무(無)에 가까웠다. 로망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까지 말했다. 『적』은 카레르의 대표작이지만 악마와 직면한 대가는 컸다. 이후 카레르는 몇 년 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극심한 우울 상태에서 문학을 단념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어둠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후속작 『러시아 소설』과 『왕국』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김영준 열린책들 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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