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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포항제철’·봉수 흔적 뚜렷…‘장수 가야’ 깨어나라

이훈범의 문명기행
삼국시대의 고대 봉수가 발견된 지역은 국내에서 전북이 유일하다.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88개의 봉수 터가 남아있는데, 그것의 종착점은 장수다. ‘장수 가야’의 존재를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다. 사진은 전북 7개군이 2017년 남원과 장수 경계에 세운 봉수기념비. [박종근 기자]

삼국시대의 고대 봉수가 발견된 지역은 국내에서 전북이 유일하다. 전북 동부 산악지역에 88개의 봉수 터가 남아있는데, 그것의 종착점은 장수다. ‘장수 가야’의 존재를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다. 사진은 전북 7개군이 2017년 남원과 장수 경계에 세운 봉수기념비. [박종근 기자]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 사이에 큰 고개가 하나 있다. 해발 734m의 육십령(六十嶺)이다. 소백산맥의 덕유산과 백운산 사이의 고산준령이다. 오늘날엔 대진 고속도로가 뚫려 이용이 덜하지만, 예부터 영남과 호남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육십령이란 이름엔 흔히 그렇듯 여러 가지 버전의 유래가 있다. 고갯길이 60굽이라서 그렇다고도 하고, 고개에서 서로 장수, 동으로 안의 읍치(邑治)까지 각각 60리여서 그렇다고도 한다. 워낙 산세가 험한지라 산적들이 들끓어 60명이 모여야만 넘을 수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다. 산적들을 피해 온 곳이라는 ‘피적래(避賊來)’ 마을이 함양에 있고, 큰 도적 마을이라는 ‘대적(大賊)골’이 장수에 남아있는 걸 보면 가장 그럴듯한 버전이다.
 
그런데 최근 새로운 버전이 생겼다. 대적골에서 제철 유적이 발견되면서 고고학 발굴팀이 조사에 나서자, 동네 어르신들이 꺼림직한 표정으로 지표조사를 말리더란다. 산적들의 소굴을 발굴하다니. 산적들이 칼이나 창 따위를 벼리던 곳을. 공연히 인골 더미라도 파헤치는 게 아닌가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당시 대적골서 만든 철강제품, 중·일 수출도
 
하지만 발굴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대적골이 철광의 채취서부터 제련·단야·주조에 이르는 일괄공정 시스템을 갖춘 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대적골이 그야말로 고대의 포항제철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이야 철광석을 수입해야 하니 바닷가에 제철소를 만들었지만, 과거에는 철광석이 풍부한 계곡에 자연스럽게 제철시설이 들어선 것이다. 실제로 장수 번암의 상추가 유명한데, 그 이유가 철분이 많이 함유돼있어 몸에도 좋을 뿐더러 보존 기간도 다른 상추보다 2주 이상 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철에서 만든 철강제품이 전 세계로 수출되듯, 대적골에서 나온 철강제품이 한반도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수출됐다. 쇠가 좀 무겁나. 운반수단이 변변찮던 시대에 쇳덩이를 옮기려면 장정 60명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육십골의 새로운 유래가 그렇게 나왔다. 고대에 철기는 화폐로도 통용되던 고부가가치의 귀중품이었다. 이를 노리는 도적들이 철 운반 통로에 출몰했을 것이라는 상상도 어렵지 않다. 그렇게 쇠도 있고 도적도 등장하는 ‘육십령’ 이름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 만큼 대적골의 한자 이름도 큰 보물이 쌓여있다는 뜻의 ‘대적(大積)골’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지역 여론이기도 하다.
 
대적골 제철 유적에서는 도기와 백자기, 옹기들의 조각들이 함께 발굴됐다. 그중 가야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고대의 포항제철이 가야에서부터 비롯됐을 것이라 믿고 있다. 일대의 지표면에서 이미 가야의 상징적 무늬인 물결무늬 토기 조각이 발견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을 다룰 줄 아는 장인인 가야인들이 천혜의 철 산지를 내버려둘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해발 800m인 대적골 제철유적 밑에는 가야의 흔적이 잠자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 깊은 잠을 깨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게 우리의 과제다.
 
게다가 또 다른 결정적 증거가 있다. 바로 봉수(烽燧)다. 주지하다시피 봉수란 연기와 불로 정보를 원거리에 전달하던 고대의 통신수단이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위급한 일을 알렸다. 현재까지 전북지역에서 확인된 봉수 터가 모두 88개다. 돌로 연대를 쌓고 그 위에 아궁이와 굴뚝 시설인 연조를 만든 조선시대의 봉수와는 달리, 쪼갠 돌로 장방형의 단을 만들고 돌로 쌓은 석성을 한 바퀴 두른 형태다. 고대 삼국시대 가야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봉수는 주로 변방지역의 긴급상황을 중앙에 전달하는 군사 통신시설인 만큼 세력의 중심지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의 5개 봉수로의 종착점이 한양의 남산이었던 것과 같다. 전북지역 봉수 88개 중 장수에 21개로 가장 많다. 나머지 67개의 봉수 역시 장수로 수렴하고 있다. ‘장수 가야’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변한 12국 중 ‘반로(半路)국’이란 이름이 나온다. 이는 6세기 초 중국 양나라에서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나오는 ‘반파(叛波)국’이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반파(伴跛)국’의 오기라는 게 정설이다. 지금까지는 이 ‘반파국’을 후기 가야의 맹주의 고령 대가야, 즉 가라국이라고 믿어왔다. 『일본서기』 계체천황 8년(514) 3월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3월 반파가 자탄과 대사에 성을 쌓고 만해와 연합해 봉수와 군수창고를 설치해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와 마수비에 성을 쌓고 마차해, 추봉과 연합해 군사와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했다. 남녀를 포로로 삼고 마을을 노략질하니 습격을 받은 곳은 살아남은 자가 드물었다.”
 
514년이면 신라의 부흥기인데 그런 신라를 공격하려면 대가야 정도의 수준은 돼야 한다는 게 반파국을 대가야로 보는 이유였다. 아무리 양보한다 해도 반파국이란 대가야의 변방 이상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일본서기』가 말하는 가야의 봉수가 백두대간 동쪽으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반파가 대가야였다면 봉수의 종착지가 고령이어야 한다. 그러나 고령 지역 어디에서도 봉수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령 등 백두대간 동쪽엔 봉수 흔적 없어
 
전북 일대에서 대가야와 유사한 토기들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장수 역시 대가야 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북 동부의 고원지대에서 독자 세력을 확장해 신라와 백제에 대항한 장수 가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이 지역에 존재하는 엄청난 고분의 양과 규모만 봐도 그렇다. 장수처럼 중대형 고분 200여 기가 군집을 이루는 곳은 기존의 가야 영역에서도 찾기 힘들다. 특히 고분에서 발굴된 ‘꺾쇠’의 존재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목관을 만들 때 쓰는 꺾쇠는 왕실 무덤에서나 발견되는 유물”이라고 이현석 장수군 학예사는 설명한다. 게다가 철과 봉수를 가지지 않았나. 철과 봉수는 그 시대의 최첨단 제조업과 통신산업이었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이 감싸주는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철과 봉수가 제공하는 기술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잘 짜인 내륙교통망을 100년 이상 운용한 강소국이 반파국, 즉 장수 가야였던 것이다.
 
장수 가야는 결국 백제에 복속되고 말았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백제 영토에 편입됐는지는 베일에 쌓여있다. 그것을 들춰내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 유적과 유물을 소중히 보존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과제다. 장수군에도 경상도 일대의 가야 지역 지자체들처럼 가야유적 박물관이 있어야 할 절실한 이유다.
 
평상시엔 봉수 1개, 적과 교전 땐 5개 활활
남산 봉수대에서 재연된 봉수 의식. [연합뉴스]

남산 봉수대에서 재연된 봉수 의식. [연합뉴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사용된 주요한 군사 통신수단이었다. 1903년 발간된 백과전서인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전신제도의 도입으로 봉수제도가 공식 폐지된 1895년까지 전국적으로 643개에 달하는 봉수대가 있었다. 함경도 경흥과, 경상도 부산, 평안도 강계, 평안도 의주, 전라도 순천에서 출발하는 5개의 봉수로가 한양의 남산 봉수로 집결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정보를 전달하는데 사람이 걸어서 18일, 말을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15시간 이상 걸리는데 봉수는 6시간 정도 걸렸으므로 시속 100㎞ 정도의 대단히 효율적인 통신망이었다. 함경도에서 아침에 올린 봉수 역시 해질녘에는 한양에 도달했다고 한다. 매일 전국의 5개 봉수로가 한양 남산 봉수에 도달하는 시간을 초저녁 무렵으로 규정한 ‘경봉시한(京烽時限)’이 있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은 봉수가 불가능해 말을 타고 전달하기도 했다.
 
봉수 방법은 고려시대까지 당나라 제도를 따라 일반적으로 4가지 신호체계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5단위 신호체계로 바꿨다. 봉수대 마다 봉화 굴뚝을 5개 만들어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했을 때 3개, 국경을 넘어오면 4개, 적과 교전하고 있을 때 5개의 봉수를 올렸다. 이 같은 5단위 체계는 우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변방의 위급상황을 중앙정부에 알리는 게 봉수의 목적이었지만, 백성들 역시 매일매일 봉수 신호를 관찰하며 생업에 임했다. 한 줄기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고 밭을 갈았으리라.
 
봉수대 간의 거리는 보통 10~20리, 외적의 침입이 우려되는 연안지역의 경우 5~15리 이내로 조밀하게 배치됐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쉬운 내륙 산간 지역의 봉수는 30~50리에 달하기도 했다. 환경 여건에 따라 2~20㎞ 구간으로 봉수가 설계된 것이다. 장수를 중심으로 한 전북 동부지역의 봉수대 간 간격은 4~6㎞ 정도다. 봉수 역시 봉수대에서 다음 봉수대로 순차적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인 만큼 오늘날의 마이크로웨이브 무선통신 중계방식과 기본적으로 같다. 하지만 전파의 속도는 초속 30만㎞로 전국 어디서든 1초 이내에 도달한다.
 
대기자 / 중앙 콘텐트랩

대기자 / 중앙 콘텐트랩

이훈범 대기자 / 중앙 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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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