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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비엔날레 지휘한 아즈마야의 소울 푸드는 돼지국밥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2010년 부산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던 일본인 아즈마야 다카시. 그는 1년 동안 부산에 상주하면서 돼지국밥을 즐겨 먹었다. [사진 부산비엔날레조직위]

2010년 부산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던 일본인 아즈마야 다카시. 그는 1년 동안 부산에 상주하면서 돼지국밥을 즐겨 먹었다. [사진 부산비엔날레조직위]

2012년 가을, 도쿄발 비보가 서울과 부산으로 날아왔다. 미술기획자 아즈마야 다카시(東谷 隆司)의 부음이었다. 44세의 젊은 그가 갑자기 죽었다. 황망한 비보였다.
 
2010년은 특기할 만한 해다. 2년마다 열리는 부산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일본인 기획자가 뽑힌 것이다. 그 이름은 아즈마야 다카시. 해방 후 한국의 예술계 행사에 총감독을 일본인이 맡은 건 아즈마야가 처음이었다. 한국의 미술계도 놀랐지만 일본의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미워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일본인이 한국에서 총감독이 된 것이다. 아즈마야의 총감독 취임은 양국을 지배하던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사건이 되었다.
 
세계의 수많은 이방인이 뉴욕에 와서 꿈을 이루듯, 한국에서도 이국에서 온 문화유목민의 꿈이 실현되는 시대가 왔다. 당시 일본미술계는 오랫동안 불황의 그늘 속에 있었다. 미술기획자들에게는 일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즈마야의 총감독 선임 뉴스는 그들에게 심리적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일본의 미술인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아즈마야, 그는 도쿄의 밤을 누비던 사나이였다. 행정서류 작성에는 능숙하나 실질적인 행동력과 돌파력이 부족한 일본의 여느 기획자들과는 전혀 다른 체질의 소유자였다. 젊은 화가들의 감성이 깨어나는 시간인 야밤에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들이 주로 출몰하는 곳은 오모테산도와 신주쿠였다.
 
 
돼지국밥은 오키나와~부산 잇는 식문화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오모테산도 힐스는 원래 재개발 직전의 낡은 도쥰카이 아오야마(同潤会青山) 아파트였다. 집세가 쌌기에 영세한 화랑들이 들어섰다. 자연스레 그 일대는 미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홍대 앞의 책방 아티누스의 롤 모델이 된 나디프에 미술인들이 몰려들었다. 예술서적 중심의 책방인데 자그마한 전시장을 겸하고 있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지만 당시엔 아직 로컬 작가였던 무라카미 다카시가 브라질 출신의 일본인 3세 작가들을 비롯하여 후배작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나디프에서 세를 과시하곤 했다.
 
아즈마야는 이 일대를 거의 매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인근에는 전시 후 값싸게 뒤풀이를 할 만한 허름한 식당이 많았다. 장소를 대여해 주는 바가 있어, 한국 영화의 밤 등 매주 주제가 바뀌는 정기모임에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몰려 좁은 공간에 선 채로 몇 시간이고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주쿠의 골덴가이에도 나타났다. 골덴가이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혼밥문화를 자극한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의 현장이다. 좁은 골목에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오키나와 스타일 술집을 찾아 일본 비제도권 아티스트의 선봉으로 존경받던 오다케 신로(大竹神郞)와 함께 밤을 새우기도 했다.
 
부산비엔날레와 인연을 맺기 전 아즈마야는 한국에서 열린 한두 번의 전시에 커미셔너로 참여했다. 2002년 서울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탠져블 사운드’전에는 동경의 ICC(통신회사 NTT에서 만든 실험적 미술 플랫폼)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일본의 소리조각그룹인 WrK의 작가 쓰노다 토시야(角田俊也)의 커미셔너로 참가했다. 작가보다 며칠 전에 서울에 도착해 소리조각의 제작에 필요한 솔리드 바이브레이터 등 전기 전자부품들을 을지로와 청계천의 공구골목을 부지런히 쏘다니며 사서 모았다. 역시 현장에 강한 기획자였다.
 
북촌의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가까운 인사동을 찾았다. 만만한 가격에 엄청난 수의 반찬이 올라오는 인사동의 정식에 놀랐다. 돼지수육에 젓가락이 자주 갔다.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도 좋아했다. 나중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김치로 도쿄에서 김치찌개를 요리해서 먹기도 했다. 2002년이라면 일본인들에게 김치는 아직 낯설었고 소량으로 포장되는 샐러드 개념으로 통했을 때다. 먹성이 좋아 작은 덩치에 과음과 과식으로 위에 자주 탈이 나곤 했다. 약한 위장을 고치기 위해 서울 근교에서 옻닭을 한 마리 푹 고아 먹으려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즈마야 다카시가 총감독이었던 2010년 부산비엔날레에 전시됐던 작품. [중앙포토]

아즈마야 다카시가 총감독이었던 2010년 부산비엔날레에 전시됐던 작품. [중앙포토]

2008년에는 부산비엔날레의 일본 측 커미셔너가 됐다. 아직 일본 현대미술계의 일류작가들이 한국의 비엔날레를 경원시하던 때였다. 밤의 사나이답게 몸을 던져 주변의 작가들을 설득했다. 카토 고, 모리무라 야스마사, 무라야마 루리코, 나카무라 테츠야, 니시오 야스유키 토쿠토미 미츠루, 야마카와 후유키 등 명실상부하게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부산을 찾았다. 그들은 파워풀한 대형작업들을 출품했다. 이제까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던 부산비엔날레가 갑자기 엄청난 존재감의 대형비엔날레로 비약한 데에는 아즈마야의 활약이 컸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부산비엔날레의 총감독이 됐다. 부산비엔날레의 첫 번째 외국인 감독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산비엔날레나 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은 현장에 상주하지는 않았다. 비엔날레의 감독이 외국인일 경우 자국에서, 한국인 감독일 경우 서울에다 사무실을 두고 현장을 찾아가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다 보니 막상 비엔날레가 열리는 지역의 작가들이 소외되기 일쑤였다.
 
아즈마야는 부산의 작가들을 비엔날레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아예 일 년간 부산에서 상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음식이 입에 맞아야 했다. 복국, 대구탕, 밀면, 소고기국밥, 회 등 다양한 식단을 자랑하는 부산의 음식 중에서도 돼지수육과 돼지국밥에 입맛이 당겼다.
 
삶은 돼지고기나 돼지국밥은 구로시오 해류를 따라 오키나와, 제주도, 부산을 이어주는 식문화다. 아즈마야는 부산시립미술관이 가까운 해운대시장에서 처음으로 돼지국밥을 배웠다. 돼지국밥은 차슈가 듬뿍 들어간 진한 국물의 일본라멘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나중에는 돼지국밥의 일번지인 서면으로도 진출했다. 열심히 돼지국밥을 먹으며 그 힘으로 수많은 부산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한국말을 전혀 못했지만 요령껏 그들의 작품세계를 두고 격한 토론을 벌였다. 덕분에 부산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작가가 2010년 대거 부산비엔날레에 참가해 당당히 세계적 수준의 작가들과 경쟁할 수가 있게 됐다.
 
예전의 농촌공동체에서는 겨울에 대소사를 다 치렀다. 결혼식 등 대사가 닥치면 키우던 집돼지를 잡는다. 피를 받아서는 선지를 만든다. 필요한 살코기는 발라내고 나머지 몸통을 잘 씻어 드럼통의 뜨거운 물 속에다 넣어 살짝 익혀 털을 뽑는다. 다시 한 번 더 삶으면 수육이 나온다.
 
이 국물에 몇 점의 살코기와 선지가 더해진 다음 큰 주전자에 담겨져 잔치에 일손을 더해 준 마을의 여성들에게 골고루 분배가 된다. 양을 불리기 위해 이 국물에 물을 좀 더 붓고 겨울철 노지에서 나는 봄동을 넣어 끓인다. 적당히 식은 밥을 넣으면 돼지국밥이 완성된다. 껍데기 고기에는 구둣솔 같은 뻣뻣한 돼지털이 그대로 박혀있기도 했다. 내장도 함께 삶아진 국물이라 돼지 특유의 구린내가 강하게 나는 국밥이었다. 겨울의 농촌은 돼지국밥 공동체이기도 했다. 대구·밀양·부산에는 돼지국밥집이 많다. 아즈마야는 따끈한 돼지국밥을 통해 부산의 작가들과 정신적 온기와 영감을 나누는 미술인 공동체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록 공연 곁들인 49재 … 죽어서도 멋진 사나이
 
아즈마야 다카시는 1968년 나고야 인근 미에현의 욧카이치(四日市)에서 태어났다. 공장이 밀집한 도시라 분위기가 거친 곳이다. 거친 토양에서 생장했지만 드물게 엘리트 코스인 도쿄예대로 진학했다. 아즈마야는 평균적인 일본 미술인들과는 달리 순응을 거부하는 대신 강력한 생명력과 전투력으로 기존 질서를 깨고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기를 좋아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던 모리미술관에 반기를 들고나온 것도 그런 기질 때문이었다. 생래적으로 독립큐레이터에 최적화된 체질이었다.
 
아즈마야는 기획자, 평론가 이전에 작가이며 음악가, 연주가였기에 그와의 술자리에서는 항상 화려하고 다채로운 퍼포먼스가 연출됐다. 가라오케에서 딥퍼플의 ‘하이웨이 스타’를 거뜬히 소화하는 걸출한 음악적 기량의 사나이이기도 했다. 이 매력적인 사나이를 많은 미술인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1년 3월 일본의 동북 해안을 뒤덮는 쓰나미가 발생했다. 원전의 방사능 누출사고가 터졌다. 아즈마야는 자원봉사자로 동북 지역을 찾아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만큼 충격도 컸다. 그 충격은 자기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졌다. 결국은 자신을 소멸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아즈마야의 49재는 2012년 11월 29일 그가 일했던 모리미술관이 자리한 롯폰기 힐스 근방의 수퍼디럭스에서 있었다. 그를 사랑한 친구 백여 명이 모였다. 헤비메탈 공연과 그를 추모하는 스피치가 자정까지 이어지는 기묘한 49재였다. 아즈마야 다카시, 그는 죽어서도 멋진 사나이였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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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