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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바우하우스는 지식혁명 일군 ‘인류 첫 창조학교’

[SPECIAL REPORT]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혁명의 본질 ‘아버지 죽이기’ 퀸의 머큐리도 부르짖다
느닷없는 프레디 머큐리 열풍이다. 오래전 퀸이 한창 인기 있을 때 나는 그저 ‘보헤미안 랩소디’의 ‘갈릴레오’ 부분만 열심히 따라 불렀다. 다른 가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가사를 알았어도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에서야 비로소 이해한 발라드 시작 부분의 가사 내용은 이렇다. “Mama, just killed a man(엄마, 방금 한 남자를 죽였어요), Put a gun against his head(그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Pulled my trigger(방아쇠를 당겼어요), Now he’s dead! (그는 죽었어요!)” 그 멋진 멜로디의 가사가 “그를 죽였다”는 살벌한 고백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무척 황당했다. 도대체 프레디 머큐리는 누구를 죽인 것일까?
 
아버지다. 프레디 머큐리가 동성애자이기에 자신의 ‘남성성’을 죽여 버렸다고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유럽에서 ‘아버지’는 전통·권위를 포함해 젊은이들을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윤리와 도덕을 일컬을 때 쓰는 단어다. 68세대가 그랬고, 히피가 그랬다. 서양의 모더니티는 끊임없이 ‘아버지를 죽이는 과정’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였다”고 부르짖었던 ‘그’는 바로 이 ‘아버지’였다.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여기고,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억압하는 ‘아버지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프레디 머큐리의 저항인 것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제목부터 ‘아버지의 나라(fatherland, 독어로는 Vaterland)’를 거부한다. ‘보헤미안’이란 관습과 전통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집시적 삶을 의미한다. 세기말 유럽의 예술가들은 ‘보헤미안’을 자처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La Bohème)’의 주인공들은 시인·화가·철학자·음악가와 같은 보헤미안들이다. 당시에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야 진정한 예술가였다.
 
세기말 유럽 예술가들 ‘보헤미안’ 자처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초대 교장이었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설계했다. 독일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사진 윤광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초대 교장이었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가 설계했다. 독일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사진 윤광준]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서구사회의 ‘살부(殺父)’ 전통을 구체화했다. 『토템과 터부(Totem und Tabu)』라는 책에서다. 1913년 출간된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개인 무의식에서 출발한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집단 무의식에까지 확대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처음으로 개념화된 것도 바로 이 책에서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가 자신이 쓴 책 중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책이 될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의 자부심과는 달리 『토템과 터부』는 가장 격렬한 비판에 부딪힌 책이 되었다.
 
인류의 종교와 사회 제도의 출발을 프로이트는 원시 시대의 토템 축제를 통해 설명한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모든 여자를 독점하고 있는 것에 분노한다. 아들들은 합심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그 시체를 나눠 먹는다. 아버지의 시체를 먹는 행위는 아버지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가져오려는 시도다. 아버지의 능력과 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인 것이다. ‘살부’의 행위는 이렇게 ‘경외심’과 ‘적개심’의 양가적 감정이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 시체를 먹는 축제를 통해 이 같은 양가적 감정을 해결했다(근대에 들어서면 이 같은 축제는 ‘혁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하여간 기막힌 프로이트의 상상력이다.
 
아버지를 죽였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의식’이 아들들에게 남겨졌다. 또한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아들 형제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광란의 축제가 끝나면 반드시 이런 혼란과 허탈함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공포에 사로잡힌 아들들은 해결책을 고안해낸다. 두 가지 ‘터부’다. 우선 아버지를 대체하는 토템동물을 만들고 살해를 금지한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계속 살아있는 것이 되고, ‘살부’의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터부는 아버지의 여자들과 성관계를 금하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빼앗은 획득물을 다 함께 포기함으로써 형제들 간의 갈등을 뿌리부터 없애버린 것이다. 토템 터부는 ‘종교의 기원’이 되고, 근친상간 터부는 ‘사회제도의 기원’이 된다.
 
인류의 종교와 사회 제도의 출발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살부’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이끌어낸 프로이트의 놀라운 상상력 덕분에 서구의 모더니티는 ‘혁명’을 사회발전을 위한 정당한 과정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크게 영향받은 오스트리아의 정신과의사 오토 그로스(Otto Gross·1877~1920)는 ‘살부’와 ‘혁명’을 보다 명확하게 연결시켰다. 아나키스트였던 오토 그로스는 빌헬름 라이히와 더불어 정신분석학의 ‘과격분자’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정신분석학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연결시키려고 했던 두 사람 모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회에서 쫓겨났다.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를 열심히 쓰고 있던 1913년 4월 오토 그로스는 베를린에서 발행되던 잡지 ‘악치온(Aktion)’에 ‘살부’를 혁명과 연결시킨 ‘문화적 위기 극복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발표한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된다. “무의식에 관한 심리학의 도움으로 남녀관계가 자유롭고 행복한 미래를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혁명가들은 가장 근원적인 형태의 폭력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권력에 맞서 싸운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기도 했다.
 
수년 전 독일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던 책 『1913년: 세기의 여름』의 저자 플로리안 일리스는 1913년을 아예 ‘살부의 해(das Jahr des Vatermords)’로 규정한다. 이전 시대를 지배했던 가치체계를 뒤집어엎는 ‘살부’의 세계관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살부’와 관련
 
베를린 바우하우스 박물관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필자 일행. [사진 윤광준]

베를린 바우하우스 박물관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필자 일행. [사진 윤광준]

숫자가 아닌 내용으로 구분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20세기라고 부르는 시대는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1914년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야 한다. 절망·허무·퇴폐의 ‘세기말(Fin de Siecle)’이라는 우울한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라고 긍정인 의미로 불리기도 하는 19세기는 아버지를 죽인 1913년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고 플로리안 일리스는 주장한다.
 
서구의 20세기적 모더니티는 ‘살부’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그 시체를 나눠 먹는 광란의 축제가 끝난 후 공포와 혼란에 빠진 ‘토템과 터부’의 아들들처럼 인류는 ‘살부의 해’인 1913년이 지나자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다. 약 1000만 명이 죽고, 약 2000만 명이 부상당한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말에 시작돼 1918년 11월에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명확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패전국의 멍에를 뒤집어 쓴 독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에서는 ‘살부’의 첫 열매로 ‘바우하우스(Bauhaus)’가 설립된다. 1919년의 일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바우하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에 개교해서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까지 불과 14년 유지됐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에 미친 바우하우스의 영향은 엄청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주 사소한 물건에까지 개입하는 ‘디자인’이라고 하는 새롭고도 놀라운 영역이 바로 이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을 추구했다. 이는 ‘과학과 기술의 통합’을 추구한 ‘산업계몽주의’라 불리는 ‘지식혁명’의 계보를 있는 또 다른 ‘지식혁명’이었다.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위 사진)는 120㎞ 떨어진 공업도시 데사우로 1925년 이사한다. 단순한 이사가 아니다. 세계관의 변화가 동반된 이사다.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위 사진)는 120㎞ 떨어진 공업도시 데사우로 1925년 이사한다. 단순한 이사가 아니다. 세계관의 변화가 동반된 이사다.

‘혁명(revolution)’이란 단어는 원래 라틴어 ‘회전’‘순환’을 뜻하는 ‘revolutio’에서 유래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에서 사용한 ‘revolutio’는 ‘회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혁명’이 ‘급격한 정치적 변혁’을 뜻하게 된 것은 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에서부터다. 정치적 영역에만 사용되던 ‘혁명’은 20세기 들어서면서 ‘산업혁명’ ‘과학혁명’과 같은 개념으로 그 외연을 확장했다. 앞서 설명한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본다면 이전 시대의 모든 가치관을 뒤집어엎는 ‘혁명’의 본질은 ‘살부’에 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아주 ‘혁명’과잉이다. 그런데 많이 어색하고 이상하다. 언젠가부터 모두 ‘4차 산업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을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1차 산업혁명’이 1760년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화·기계화를 뜻한다는 것은 다들 안다. 그러나 도대체 ‘2차’ ‘3차’ ‘4차 혁명’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기반의 정보통신기술의 획기적 발전 정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혁명’이라고 하려면 도대체 이전 시대와 어떻게 투쟁하고, 새로운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과 연관되어 떠오르는 ‘살부’의 기억은 전혀 없다. ‘4차 산업혁명’은 산업혁명 이후 지속된 기술발전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4차 산업혁명’이 수상한 또 다른 이유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중요하게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외국학자들과의 대화에서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뭔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다. ‘4차 산업혁명’을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독일의 비즈니스맨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81)이다. 세계 각국의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해 경제장관·기업가·교수·언론인들이 매년 스위스 시골의 휴양지 다보스에서 모이는 최고급 사교클럽, 일명 ‘다보스포럼(Davos Forum)’을 만든 사람이다. 화려함과 명성에 비해 구체적 내용이 없다는 비판에 고심하던 클라우스 슈밥이 2016년 1월 다보스포럼에서 발표한 콘셉트가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독일에서 이미 논의되던 ‘인더스트리 4.0’의 변형에 불과하다.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 독일의 전통적 제조업이 위기에 처하자 생산과정의 자동화를 적극 논의하자는 구호가 바로 ‘인터스트리 4.0’이다.
 
박근혜 정부 ‘창조경제’는 낡은 이데올로기
 
비즈니스맨으로는 탁월하지만, 미래학자라고 보기에는 사뭇 빈약한 학문적 소양을 가진 클라우스 슈밥의 이 어설픈 개념이 느닷없이 유독 한국에서만 각광받게 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박근혜 정부의 몰락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부르짖었다. ‘창조경제’를 전담하는 경제부처도 새로 만들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미래창조과학부’다. ‘미래’도 애매한데, ‘창조’와 ‘과학’까지 연결한 거다. 행정부는 매우 구체적인 일을 실행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렇게 온갖 애매한 개념을 다 몰아넣으니 무슨 일이 가능할 리 없다.
 
박근혜 정부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문화융성’ 정책이다. 광고를 찍던 CF감독에게 온 나라의 문화정책을 맡기고 ‘말 타는 처녀’나 지원했다. 그러나 ‘문화융성’ 정책보다 내용적으로 더 황당했던 것이 바로 이 ‘창조경제’다. 전국을 돌며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만들었다. 대기업의 멱살을 잡아 끌어 지원자금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산업화시대의 방식이다.
 
박근혜 정부가 몰락하자 ‘창조경제’라는 단어의 사용은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 구호는 여전히 필요했다. 바로 이 틈을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가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직속의 ‘4차 산업혁명위원회’까지 설치했다. 참으로 낡고 애매한 개념으로 여러 사람들이 바쁜 요즘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큰일 난다!
 
박근혜 정부는 ‘산업화 세대’를 대표했다. 산업화 시대의 낡은 이데올로기로 ‘창조경제’를 부르짖었으니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업화시대의 완벽한 몰락과 더불어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지극히 낡은 산업화시대의 구호인 ‘산업혁명’의 아류에 불과한 ‘4차 산업혁명’을 또 다시 부르짖는 것은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3차’든 ‘4차’든 아주 낡은 ‘산업혁명’이란 개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은 대중을 호도하기 아주 쉬운 개념이다. 일단 숫자가 들어가면 사람들은 뭔가 객관적이라고 느낀다. 더구나 4차까지 진행되었다니 더욱 믿을 만하게 느낀다. 그러나 아무도 그 내용이 뭔지 구체적으로 묻지 않는다. ‘4차’ 뒤에 따라붙는 ‘산업혁명’은 ‘4차 산업혁명’이란 개념을 더욱 신뢰롭게 해준다. 증기기관 발명의 ‘산업혁명’은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속는 거다.
 
‘산업혁명’이 아니라 ‘지식혁명’이다. 증기기관 발명으로 시작된 ‘1차 산업혁명’도 ‘산업혁명’이 아니라 ‘지식혁명’이라 해야 옳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기계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변화를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라 처음 명명한 이는 영국의 경제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1852~1883)다. 우리에게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유명한 영국의 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1889~1975)는 그의 조카다.
 
오늘날 그의 ‘산업혁명’ 개념은 여러 모로 비판받고 있다. 우선, ‘영국의 산업혁명’이 과연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산업사회로의 급속한 이행과정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의 산물일 뿐 ‘혁명’이라고 이름붙일 만큼의 급속한 사회변동이 아니라는 비판이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같은 기술의 진보를 ‘산업혁명’의 결정적 원인으로 설명하는 ‘기술환원론’ 또한 토인비의 ‘산업혁명’ 개념이 가진 결정적 결함으로 비판받는다.
 
‘기술환원론’은 “산업혁명이 왜 동양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묻는 ‘니덤의 질문(The Needham Question)’에 대해 전혀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은 유럽에 전혀 뒤지지 않는 과학과 기술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학과 천문학 분야는 동시대 서양의 과학지식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기술의 진보’가 ‘산업혁명’의 원인이라면 중국에서 ‘산업혁명’에 상응하는 변혁이 먼저 일어났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 ‘4차 산업혁명’도 애매한 개념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 [중앙포토]

바우하우스 정신을 계승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 [중앙포토]

토인비의 ‘산업혁명’ 개념에 대한 의심은 오늘날 ‘대분기(Great Divergence)’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18세기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동·서양의 차이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된 원인으로 노스웨스턴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조엘 모키르(Joel Mokyr·73)는 ‘산업계몽주의’라는 ‘지식혁명’을 들고 있다. 합리적 세계관의 계몽주의는 당시 크게 발전하고 있던 자연과학적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지식’으로 바꾸게 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서구사회의 변화를 토인비는 ‘산업혁명’이라 정의했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통합’을 가능케 한 ‘산업계몽주의’라는 지식혁명의 결과가 서양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케 했던 ‘대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의 하위분야일 뿐이다).
 
‘과학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지식혁명은 당시 유럽을 지배했던 그리스·로마의 낡은 세계관과 투쟁했던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편지 공화국’은 ‘편지’를 통해 소통했던 당시 유럽의 지식공동체를 지칭한다. 국경을 초월해 소통했던 ‘편지 공화국’은 실재했던 집단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는 ‘편지 공화국 지형도(Mapping the Republic of Letters)’라는 프로젝트를 수년 전부터 진행하고 있다. 관찰과 실험으로 무장한 16, 17세기 편지 공화국의 지식인들이 ‘고대인과의 투쟁’이라는 ‘살부’의 실천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극복해 새로운 유럽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 조엘 모키르의 주장이다.
 
이 설명모델에 따르자면 동양은 ‘과거제도’에 묶여 ‘고대인과의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서양에 크게 뒤지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즉 ‘과학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지식혁명’이 동양에는 부재했다는 이야기다. 산업혁명에 대한 기술환원론적 설명이나 ‘영국 예외주의’보다는 훨씬 설득력 있다. ‘과학과 기술의 통합’이 ‘1차 지식혁명’이었다면,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일어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은 ‘2차 지식혁명’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바우하우스는 그 시대의 문화적 ‘깔때기’였다. 당시 1차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을 휩쓸었던 ‘살부’의 지식혁명이 깔때기처럼 바우하우스로 흘러들었다.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불과 14년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반향은 엄청났다. 오죽하면 애플의 스티브 잡스까지 바우하우스의 후예임을 자처했을까?
 
바우하우스는 인류 최초의 ‘창조학교’였다. ‘창조’는 ‘창조경제’ 따위로 인해 사라져서는 안 되는 개념이다.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시대착오적 ‘기술환원론’으로 대체될 수도 없는 단어다. ‘창조’야말로 오늘날 미래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에 가장 절실한 개념이다. 그래서 ‘바우하우스’인 것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학교 전임강사,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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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