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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미나이” 혼내며 차범근 키웠다, 원조 축구 영웅 최정민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1·2회 아시안컵 우승 주역
최혜정씨가 제 1회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아버지 사진 앞에서 ‘축구인 최정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최혜정씨가 제 1회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아버지 사진 앞에서 ‘축구인 최정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이회택-차범근-최순호-황선홍…. 축구팬이라면 줄줄 꿰는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다. 이 ‘거룩한 계보’의 맨 앞에 서야 할 사람이 있다. ‘아시아의 황금다리’ 최정민(1927~1983)이다.
 
1956년 9월, 홍콩에서 제 1회 아시안컵(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이 열렸다. 예선을 통과한 4개국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렸다. 1승1무(홍콩과 2-2, 이스라엘에 2-1)로 베트남과 최종전을 치른 한국은 5-3으로 이겨 초대 아시안컵 챔프가 됐다. 이 경기에서 최정민이 2골을 넣었다.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은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역시 4개국 풀리그 방식이었다. 1차전에서 한국은 베트남을 5-1로 꺾었다. 최정민이 1골을 뽑았다. 이스라엘과 대만을 연파한 한국은 아시안컵 2연패를 달성했다. 그 후로 59년째 한국은 아시안컵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17회를 맞는 2019 아시안컵이 5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개막한다.
 
최정민은 평양 부농의 아들이었다. 체격이 좋았고 마라톤·배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축구에는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에 대학생이었던 최정민은 이듬해 1·4 후퇴 때 서울로 내려왔다. 육군 방첩대(CIC) 소속으로 뛰며 골잡이로 이름을 날렸다.
 
 
‘스포츠 스타-미스코리아’ 1호 커플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첫 한-일전 겸 스위스월드컵 최종 예선 1차전. 최정민(왼쪽)이 2골을 넣은 한국이 5-1로 대승했다. [중앙포토]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첫 한-일전 겸 스위스월드컵 최종 예선 1차전. 최정민(왼쪽)이 2골을 넣은 한국이 5-1로 대승했다. [중앙포토]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아시아 대륙에 걸린 티켓 한 장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홈앤드어웨이 방식으로 맞붙게 됐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침략자 일본이 우리 땅을 밟게 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려 2경기 모두 도쿄에서 열렸다.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서를 썼다는 그 경기. 최정민은 진흙탕 속에서 열린 1차전에서 2골을 터뜨려 5-1 대승에 앞장섰다. 2차전에선 0-2로 끌려가던 한국이 정남식·최정민의 골로 2-2 무승부를 거뒀다. 대한민국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의 선봉장이 최정민이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홈페이지는 2008년 ‘라이벌전 도쿄에서 태동하다’는 제목으로 사상 첫 한-일전을 소개했다. 일본 수비수 히라키 류조는 최정민에 대해 “밸런스와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수여서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우리는 거인과 싸우는 어린이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대한축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최정민은 A매치 47경기에 출전해 22골을 넣었다. 1961년 은퇴한 최정민은 지도자로 변신해 국가대표 감독까지 역임했다. 1m78cm 훤칠한 키의 ‘꽃미남’ 최정민은 술을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그는 1983년 12월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떴다. 56세 아까운 나이였다.
 
최정민은 은퇴 전해인 60년, 미스코리아 출신 서정례씨와 결혼했다. 요즘에야 흔하지만 당시로는 ‘스포츠 스타-미스코리아 커플’ 1호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급기야 부인은 아이 셋을 데리고 친정인 미국 하와이로 들어가 버렸다. 최정민이 쓰러진 날은 맏딸 혜정씨의 결혼식 1주일 전이었다고 한다.
 
지난 연말, 서울 성북동의 한 카페에서 혜정씨를 만났다. 그는 이탈리아·독일 가구를 수입하는 업체에서 일하고 있고, 축구선수 아들도 뒷바라지하고 있다.  최씨는 아버지에 대해 “아이들에겐 자상하고 섬세한 아빠, 선수들에겐 무섭지만 사심 없는 선생님이셨죠. 진짜 멋쟁이셨고요”라며 웃었다.
 
최정민이 신었던 축구화. 1920년대 평양에서 만들었다. [연합뉴스]

최정민이 신었던 축구화. 1920년대 평양에서 만들었다. [연합뉴스]

부모님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요.
“어머니가 59년 미스코리아 선(善)에 뽑혔고, 미스 월드 최종 결선(7명)까지 나갔어요. 당시 미스코리아들이 영국에 갔다 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대회 출전 중이던 축구 대표선수들과 만찬을 같이 했는데 거기서 두 분이 만나 불꽃이 튀었다고 해요. 하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던 아버지가 어머니 속을 많이 썩이셨다면서요.
“다짜고짜 집으로 전화해 ‘최정민 선수 바꿔달라’는 여자들이 많았대요. 당대 최고 영화배우 김○○씨도 있었죠. 참다 못한 어머니가 우리 삼남매를 유학시킨다며 하와이로 들어가 버렸어요. 그 후로 아버지가 많이 외롭고 힘들어 하셨다고 해요.”
 
지도자로서 아버지는 어땠나요.
“선수들이 눈을 못 쳐다볼 정도로 무서웠어요. ‘이놈의 애미나이 새끼들’ 하면서 운동장에서 소리치던 게 생생해요. 국가대표팀 맡았을 땐 특히 차범근 선수를 많이 야단쳤던 것 같아요. 그만큼 잠재력이 뛰어났으니까 더 잘하라고 다그치신 거죠. 그렇지만 품어줄 땐 넉넉하게 품어주셨고, 윗사람 눈치를 보지 않으셨어요.”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못 올라
 
축구인 사이에서 최정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후배들은 그를 ‘정 많고 화통한 선배’로 기억한다. 이재(利財)에 밝은 최정민은 친형과 함께 갈비·냉면집을 운영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씀씀이가 컸고, 어려운 후배를 보면 그냥 보고 넘기지 않았다는 게 주위의 증언이다. 혜정씨는 “중앙대 감독 시절엔 당시 귀한 고기나 생선을 시장에서 떼 와서 어머니가 직접 요리를 해 선수들을 먹이곤 했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축구 원로들도 있었다. 사생활이 반듯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까마’(중간상인을 뜻하는 일본어)라는 별명처럼 그는 해외 나갈 때마다 국내에 없는 물건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곤 했다. 어떤 이는 이를 ‘밀수’라고 했고,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고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2005년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 에도 그는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일부 원로들의 거센 반대로 등재되지 못했다.
 
중앙대와 대표팀 시절 최정민을 감독으로 모셨던 조영증 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은 “최 선생님은 워낙 실력이 출중한 스타 출신이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셨고, 축구에 대한 집념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어요”라고 회고했다. 조 위원장은 “사생활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인 평가와 예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59년 묵은 아시안컵 가짜 금메달 저주, 이번 대회서 끊었으면…
아시안컵 금메달

아시안컵 금메달

1956년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대한민국 선수들은 순금 메달을 받았다. 1960년 서울에서 열린 2회 대회에서도 우승한 선수들에게 대한축구협회가 금메달을 만들어 걸어줬다. 모두 순금인 줄 알았는데 선수 중 한 명이 “진짜 순금인지 긁어보자”고 해서 도금한 메달인 게 드러났다. 최정민의 주도로 선수 전원이 메달을 반납했다.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금은방 주인은 “처음에 (축구협회에서) 순금 메달을 주문했는데 대금을 받고 보니 도금값밖에 안 돼 그렇게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축구협회는 “돈이 없어서 그랬으니 다음에 순금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발뺌했고, 집행부가 바뀌며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가짜 금메달의 저주’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월드컵 본선에 9회 연속 진출하는 동안 한국축구는 아시안컵에서 한 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급기야 축구협회는 2014년에 순금 메달을 만들어 박경화·이은성 등 생존자에게는 직접 전달했고(사진), 돌아가신 분들은 가족을 수소문해 전달하고 있다.
 
최정민 감독의 장녀 혜정씨는 “며칠 전 연락을 받았어요. 홍명보 축구협회 전무가 직접 전달한다고 합니다”라며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당시 선수들의 기운을 받아 후배들이 59년 만에 아시안컵을 되찾아 왔으면 좋겠어요”라며 웃음 지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 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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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