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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내게 길들여진 거야? 파블로프 개처럼?

기자
심상복 사진 심상복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15화

 
"김천씨 핸드폰 맞나요?"
"네, 그런데요."
"축하드립니다. 여기 일진무역 인사팀인데 경력직 입사 확정돼서 알려드립니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동안 누나 몰래 몇 군데 입사원서를 냈다. 그중 한 곳이었는데 인터뷰를 한 지 한 달도 넘어 포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낭보였다. 누나와 첫 미팅 때 나는, 다니던 회사가 베트남 이전을 발표하면서 몇 달 준비할 시간이 생겨 재충전차 도서관에 나오고 있다고 둘러댔다. 일부는 맞는 말이었지만 핵심은 사실과 달랐다. 그때 나는 이미 베트남행을 포기하고 퇴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실직자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게 아무리 자발적 실업이라 해도. 하지만 그 뒤 누나는 한 번도 내 직장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다. 직장뿐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에 관해 물어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질문은 늘 나의 몫이었다.
 
-그만큼 내게 관심이 없다는 건가, 글공부 말고는. 궁금한 것도 없는 남자에게 작문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시키는 의도는 뭘까.
참, 알아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관심이 없다 해도 나 스스로는 몹시 걸렸다. 멀쩡하게 생긴 30대 총각이 출근할 곳이 없어 맨날 도서관이나 드나들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런저런 연줄을 동원해 직장을 알아봤으나 다들 알듯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베트남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퇴사위로금까지 주었던 사장님의 소개로 마침내 새 직장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새해부터 출근인데 문제없으시죠? 1월 2일요, 그날 시무식부터 참석할 수 있겠죠?"
질문 같았지만, 통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길지 않은 실업자 생활도 이제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누나에게 이 뉴스를 바로 이메일로 전했다. 그동안 이미 백수였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새해부터 새 직장을 얻어 출근하게 됐다고.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지난여름은 정말 뜨거웠다. 열대야는 물론 아침 최저기온이 30도를 넘는 날이 이어졌다. 기상청은 111년 만의 폭염이라고 했다. 하지만 천정이 6m를 넘는 이곳 디지털도서관은 24도를 유지하며 더없이 쾌적했다. 마침 집에서도 멀지 않았다. 지하철 3호선 옥수역에서 고속터미널역까지는 20분이면 충분했다. 한 가지 흠이라면 거기서 도서관까지 걸어오는 시간도 그만큼 걸린다는 점이었다.
 
책상마다 데스크톱 pc가 놓인 디지털도서관 메인홀은 좌석이 300개쯤 돼 보였다. 한복판에 자연채광을 위한 초대형 유리관이 있는데 공공기관답게 볼품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 넓은 공간에 빈 좌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남녀 비율은 8대2쯤 될까. 왜 남자가 이렇게 많을까. 그건 과거 직장생활이 남성 위주로 돌아갔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은퇴자로 보이는 이들이 대략 70%는 되는 것 같았다. 매일 출근하던 직장이 사라진 그들에게 도서관만큼 좋은 출입처가 있을까.
 
이곳이 은퇴자들의 성지가 된 것은 당연해 보였다. 새로운 수입은 없고 저축한 돈은 넉넉지 않다. 내 경우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는데 드는 돈은 교통비를 포함해 1만원이면 됐다. 점심은 4000원, 카페라테는 3200원이다. 4000원짜리 식사가 얼마나 부실할까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돼지고기 장조림에 발사믹 식초로 버무린 상추 샐러드, 물만두, 깍두기까지 반찬이 6가지였다. 미역국도 그만하면 서울시 평균은 넘을 듯했다. 요즘 말로 가성비가 아주 좋다. 도서관 이용자만 먹을 수 있느냐고? 그렇지 않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그 덕에 나도 느긋하게 책을 뒤적이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2018년 7월 16일이다. 우연이 반복되면 역사가 된다고 했다. 난데없이 회사가 해외 이전을 발표하고, 출근할 직장이 없어진 나는 도서관이나 가보자고 했고, 그러다 그녀를 만나는 역사가 탄생한 것이다.
 
무직자는 정말 죄인일까
메일을 보내고, 지난 몇 달을 되새김질하고 있는데 답신이 왔다.
-새 직장을 얻었다니 당연히 축하해야 하겠지. 그동안 난 김천씨의 상태를 대략 짐작하고 있었어. 그랬기에 더 물어보지 않았지. 괜히 난처해 할 테니까. 나도 교사생활 3년쯤 하다 백수가 된 뒤로는 누가 나의 직업을 묻는 게 두려웠어. 무직자는 이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잖아. 능력이 없는 죄 말이야. 죄인 신분에서 벗어난 거 축하해.
그런데 이게 나에게 꼭 굿 뉴스만은 아닌 거 알지? 내가 계획한 글공부는 사실 이제부터인데….
 
나는 바로 답장을 썼다.
-누나, 걱정 마세요. 누나가 나에게 만남을 허락하면서 내건 조건, 지금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글을 잘 쓰면 제가 이득이잖아요. 그걸 왜 마다하겠어요? 새해부터 출근하면 낮시간은 안 될 테니 저녁 시간으로 옮기면 되죠, 뭐. 요일은 회사 사정에 따라 바뀔 수도 있겠지만 한 주에 두 번 수업은 꼭 지킬게요.
 
진심이었다. 처음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조건 응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공부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특히 지난번 큰 칭찬을 받은 후엔 더욱 그랬다. 올해 마지막 수업은 12월 마지막 목요일 오후 4시로 정해졌다. 선생님은 이날 그동안 수업한 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줬다.
-글은 쓰는 게 아니라 고치는 것이다. 고치려면 뭔가 먼저 써야 한다. 메모도 좋고 단어만 나열한 것이어도 좋다. 한마디로 ‘막 쓴 글’이다. 잘 쓰는 것은 어렵지만 막 쓰기는 쉽다. 이렇게 막 쓴 글과의 대면이 글쓰기의 시작이다. 글짓기에서 일필휘지는 없다. 그건 서예에서나 쓰는 말이다.
-글쓰기 3단계라고 했는데 '막 쓴다, 고친다, 또 고친다.'이다.

-먼저 주제를 정하고 키워드를 추려내면 좀 더 쉽게 쓸 수 있다. 이걸 뼈대로 삼아 살을 붙여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큰 원칙 중 하나는 '문장은 짧게, 글은 쉽게'다.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도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 원칙은 하나뿐이다. 분명하게 쓰는 것이다.” 독자가 읽고 바로 이해하도록 쓰라는 것이다. 즐거운 글 읽기는 문장의 길이에도 영향받는다. 어렵게 쓰지 마라. 어렵게 쓰는 취미를 가진 사람도 다른 사람의 어려운 글은 읽지 않는다.
 
일주일에 거의 두 번씩, 그동안 수업한 횟수는 마흔 번에 육박했다.
"누나, 오늘은 왜 숙제를 안 내줬어요?"
 
그런 날은 오늘이 유일했다.
"마침내 내게 길들여진 거야? 파블로프의 개처럼?"
"하하하. 그런가요? 하긴 시종이나 개나 첫째 덕목은 같네요. 주인에게 충성스러워야 하는 거요. ㅎㅎ"
 
선생님의 정리는 이어졌다.
-글은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 물과 같이 자연스레 흐르는 글이 좋다. 읽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끝에 이르는 글.
-중언부언하지 마라. 여차하면 취객이나 노인 취급을 받는다.
-독자는 인내심이 없다. 같은 단어나 비슷한 표현을 반복하지 마라.
-글도 상품이다. 소비자, 다시 말해 독자가 누구일지 생각하고 그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써라.
-여러 이론과 원칙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글쓰기는 글쓰기로만 배우는 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직접 쓰는 것, 써 보는 것이 중요하다. 쓴 글을 글 좀 쓰는 지인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코멘트를 듣고 스스로 첨삭훈련을 하라.
-요즘은 글재주보다 스토리다. 스토리는 이미 각자의 경험 속에 있다. 그런 점에서 글감은 널려 있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싶으면 만들어 써라. 예를 들면 나를 찾는 여행이나 격투기 도전기 같은 것이다.
-화려한 글에 현혹되지 마라. 정갈한 글이 좋다. 형용사나 부사 사용을 자제하라. 남발하면 양념이 본 재료 맛을 압도하게 된다.
-제목은 일단 내용보다 중요하다. 낚시 제목은 사양해야 하지만 제목이 너무 평범하면 누구도 책을 집어 들지 않는다. 상가가 즐비한 거리에서 일단 손님을 가게 안으로 불러들여야 물건을 팔 수 있다.
 
거기까지 한숨에 내달은 선생님은 식은 커피를 쭈욱 마셨다.
"오늘 수업 끝~~ 그러고 보니 올해도 나흘밖에 안 남았네. 우리 오늘 송년회 할까?"
"……."
 
나는 잠깐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선생님은 오늘 뭔가 매듭을 지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송년회 좋죠… 그런데…."
"그런데 뭐?"
 
그날 밤 선생님, 아니 누나는 나를 안아줬다. 처음보다 더 포근했다. 세상을 다 안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뭔가 허전했다. 아니, 불안했다. 다 안았지만 아무것도 안지 못한 거 같은 이 불안함의 정체는 뭘까. 나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면서 절로 눈물이 나왔다. 나를 향한 연민인지, 누나를 향한 사랑인지,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인지….

"왜 울어? 바보같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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