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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문화탐색] 뒤샹, 바우하우스, 3·1운동…세 개의 다른 시간들

최범 디자인평론가

최범 디자인평론가

30년 전쯤 일본을 처음 방문했을 때 부러웠던 것 중의 하나는, 인상파 등 책에서만 보던 서양 미술 전시회가 자주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 것은 현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세계 유명 작가들의 전시를 쉽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질 못했다. 이제는 모네, 르누아르, 샤갈은 말할 것도 없고, 피카소 같은 인기 작가는 거의 매년 어디에선가 전시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마르셀 뒤샹이 한국에 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4월 7일까지)

 
마르셀 뒤샹은 처음이다. 뒤샹은 아무래도 대중용이라기보다는 전문가용이다. 피카소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뒤샹은 그렇지 못하다. 서양 철학사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이 있듯이, 현대미술은 뒤샹에 대한 주석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처럼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뒤샹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제 한국도 뒤샹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19년은 한국인에게 3·1운동의 해로 기억되지만, 서양 미술사에서는 뒤샹이 ‘모나리자’ 그림을 재창조(?)한 해로 기록되어 있다. 뒤샹은 길거리에서 파는 ‘모나리자’ 그림엽서에 수염을 그려 넣고 ‘L.H.O.O.Q’라는 글자를 썼다. 이 말은 불어로 ‘그녀는 엉덩이가 뜨겁다(Elle a chaud au cul)’라는 뜻의 음탕한 표현이다.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이 행위는 기존의 예술과 예술가가 지니는 전통, 신화적 권위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여지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창조와 천재성에 관한 맹신을 무너뜨리는 뒤샹의 이 같은 작업은 반예술(Anti-Art)의 전형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현대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물론 뒤샹은 이미 1917년에 변기 위에 서명을 한 ‘샘’이라는 작품으로 파문을 일으키면서 유명해진 바 있지만 말이다. 그의 삶과 작업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삶을 예술과 바꾸지 않기.’
 
1919년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Bauhaus)가 설립되었다. 바우하우스는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새로운 독일의 탄생을 알린 바이마르공화국이 세워진 도시에서 역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꿈을 안고 등장한 디자인학교였다. 바우하우스는 서구 근대의 합리성을 디자인을 통해 관철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그 자체가 모던 디자인(Modern Design)과 동의어이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 근대 모더니즘 미학의 선두주자인 마르셀 뒤샹이 처음 한국을 찾았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서구 근대 모더니즘 미학의 선두주자인 마르셀 뒤샹이 처음 한국을 찾았다.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내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19년 한국인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은 한국 민족주의의 탄생을 알린 사건이었다. 한국 민족주의는 일제 지배의 산물이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일제의 지배는 한국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뭉치게 만들었다. 조선시대의 한국인에게는 엄격한 신분질서에 따른 구별의식만 있었지 한민족이라는 동일의식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하나의 안티테제였다. 그것은 출발에서부터 역사의 좌절을 만회하기 위한 거대한 분노, 열등감, 복수심…. 그런 것들의 혼합물이었다.
 
뒤샹, 바우하우스, 3·1운동. 백 년 전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르게 흘렀던 시간들은 그로부터 백 년 후, 어떻게 흘렀고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 누군가의 말처럼 오늘날 세계는 정말 평평해졌는가(토마스 프리드먼, 『세계는 평평하다』). 결코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계의 분열은 여전하고 지역 간, 국가 간 격차는 좀체 메워지지 않고 있다.
 
뒤샹은 르네상스 이후 쌓아온 서구의 휴머니즘이라는 신화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루마니아 출신의 문학이론가인 마테이 칼리네스쿠에 따르면 서구의 모더니티(근대성)는 정치·경제 영역의 현실 모더니티와 예술 영역의 미적 모더니티로 나뉘는데, 여기에서 예술(미적 모더니티)은 정치·경제 체제(현실 모더니티)의 성찰과 비판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구 근대 예술은 서구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내부 고발자인 셈이다. 뒤샹은 “마치 바닷가 모래 위에 써놓은 글자처럼 파도가 밀려오면 지워질 운명”이라고 미셸 푸코가 말한 그 ‘인간이라는 신화’를 지우려고 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서구 근대예술의 전통에 가장 충실한 예술가였다고 할 수도 있다.
 
합리성에 의해 이상적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바우하우스의 유토피아적 신념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모더니티의 계몽을 넘어서 모더니티의 폭력성이 고발되었다. 그리고 이내 반(反)모더니티로서의 포스트모더니티의 광풍이 몰아닥쳤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른 뒤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모더니티에 대한 성찰과 보충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서구의 모더니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적인 근대 국가 건설에 실패한 조선은 제국의 지배하에서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반사 에너지를 축적하였다.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의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 즉 국가·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는 미완성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아마 그것은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인 프로젝트를 이룰 때까지 지치지 않고 우리를 내달리게 할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성립된 휴머니즘이라는 신화를 깨부수려고 했던 뒤샹, 디자인을 통해 현실 모더니티를 미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던 바우하우스, 제국주의하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어야 했던 한국인들, 지난 백 년간 이들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흘렀다. 뒤샹 전시가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나오는데, 문득 달마가 떠올랐다. 뒤샹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최범 디자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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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