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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낱말로 풀어본 북한 신년사…김일성·김정일 흔적 사라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일 보도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일 보도했다. [사진 조선중앙통신]

 
1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0여 분 동안 육성으로 읽어내려간 신년사는 200자 원고지 약 80장 분량으로 2859개 낱말ㆍ1만 글자가 조금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여기에 담긴 김 위원장 속마음을 숫자로 해석했다. 어떤 주제를 많이 언급하고 강조했는지 낱말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세어봤다. 북한 비핵화를 비롯한 북ㆍ미관계와 권력 세습 등 대내외 민감한 주제에 얽힌 비밀 코드가 보인다.
 
북한은 올해 ‘핵’ 용어를 대폭 줄였다. 지난해 1월 1일 밝힌 2018년 신년사는 핵과 관련해 22번이나 언급했다. 그러나 올해는 2번만 등장했다. 지난해 신년사는 ‘핵무력 완성’을 시작으로 ‘핵단추’와 ‘핵 타격 사정권’ 등을 강조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내 버튼이 더 크고 강하다’며 응수해 일촉즉발 핵무기 충돌 위협이 커졌다.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핵과 평화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핵과 평화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그러나 올해는 태도가 변했다. “완전한 비핵화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라며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위협적인 핵 낱말은 모두 치웠다.
 
‘핵’이 줄자 ‘평화’는 두 배 이상 커졌다. 2017년 신년사는 평화를 10번 언급했지만, 올해는 지난해 대비 250% 수준인 25번 등장했다. 지난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올해는 “북미 관계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한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며 분위기를 바꿨다.
 
이처럼 많이 쓰인 ‘평화’는 다양하게 언급되면서 그 영역도 확장됐다. 올해 신년사를 보면 ‘평화ㆍ번영’ㆍ‘평화지대’ㆍ‘평화적인 통일방안’ 등 평화가 들어간 낱말은 10여 가지가 넘는다.
 
‘평화지대’는 신년사에서 처음 언급됐다. 북한에서 펴낸 『조선말대사전』은 ‘평화지대’를 “온갖 전쟁세력과 위험이 없는 평화가 보장된 지대”라고 설명했다. 예문으로 “비핵지대와~를 창설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덧붙였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재래식 군사력 충돌 방지와 비핵지대화 등 주한미군 철수 의도까지 복선을 깔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엔 미국의 핵우산 제거도 포함된다.
 
김정은의 7년 신년사 복장.최정동 기자

김정은의 7년 신년사 복장.최정동 기자

 
남북한 사이 교감도 눈에 띈다. 올해 신년사는 ‘평화와 번영’을 5번이나 언급했는데 이는 문재인 정부 국가안보실 문건 내용과도 일치한다. 청와대는 지난달 20일 『문재인 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을 발간했는데 본문을 보면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실현”했다는 평가를 담았다.
 
미국에 대한 태도 변화도 엿보인다. 북한은 지난해 미국에 대한 비난을 11번이나 언급했다. 표현은 매우 거칠었다.  ‘미국의 무모한 북침핵전쟁책동’‘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제재봉쇄책동’ 등 비난으로 가득했다. 특히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의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다”며 미국에 총구를 겨누기도 했다.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긍정적ㆍ중립적 평가를 5번 기술했다.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을 ‘미국 대통령과 만난 유익한 회담’이라며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물론 견제구도 던졌다.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언급하며 압박했고 “미국이 신뢰성 있는 조지를 취하며 상응한 실천행동으로 화답해 나선다면”이라며 미국 태도에 따라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전략적인 입장도 보였다. 그래서 외신에선 가시가 많은 올리브(평화) 가지라고 지적했다.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사회주의, 통일, 자주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사회주의, 통일, 자주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사회주의’ 언급이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해 22번에서 올해는 32번으로 대폭 증가했다. 올해 신년사는 ‘사회주의에 대한 필승의 신념’‘사회주의의 더 밝은 앞날’ 등 북한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이다. 북ㆍ미 관계 변화와 같은 대외 조건이 변하더라도 북한 체제는 그대로 이어진다는 의지를 반영했다.  
 
이와 같은 사회주의 강조는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계속 이어진 추세를 반영했다. 집권 직전인 2012년 10번 언급했지만 2013년에는 두 배 가까이 늘어 18번 담겼다. 이후 등락을 반복하더니 2017년 12번 이후 증가 추세에 들어섰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북한체제가 자본주의 외부 물결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복고노선’을 반영했다”고 평가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오전 9시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뒷 배경으로 김일성 전 주석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대형 그림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오전 9시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뒷 배경으로 김일성 전 주석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대형 그림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통일’은 감소 추세를 이어갔다. 지난해 16번 언급됐지만, 올해는 절반 수준인 8번으로 줄었다. 2016년 신년사에서 27번까지 언급한 뒤 2017년 17번을 등 점차 감소 추세다. 의외의 결과도 발견된다. 북한이 선호하는 ‘자주’ 표현도 줄었다. 2015년 11번 이후 7ㆍ6ㆍ8번 등장하다 올해는 4번으로 떨어졌다. 김정은 집권 이후 가장 적게 언급됐다. 
 
특히 2014년 신년사 이후 강조하던 ‘자주통일’ 표현은 아예 쓰지 않았다.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은 민족주의 담론과 통일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며 “두 개 조선 정책으로 한국과 북한을 분리해 공존하겠다는 평화체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김일성과 김정일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김일성과 김정일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올해 신년사에선 김일성ㆍ김정일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들과 관련한 직접ㆍ간접적 표현조차 모두 사라졌다. 김일성ㆍ김정일의 거대한 초상화 앞에서 이뤄진 신년사 발표 분위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김정은 집권 뒤 처음 나온 2013년 신년사는 김일성ㆍ김정일을 각각 20ㆍ25번 언급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 극진하게 예우한 것이다. 당시엔 호칭도 다양했는데 이름 뒤에 ‘동지’를 붙이거나, 이름 언급 없이 ‘수령님ㆍ장군님’으로 불렸다. 또는 ‘김일성ㆍ김정일 조선’‘김일성ㆍ김정일 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김정은이 권력 세습에 나선 초기에는 선대 세대의 후광을 활용하기 위해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태도가 변했다. 김일성ㆍ김정일 언급은 16ㆍ10번으로 줄더니 지난해는 김일성ㆍ김정일 이름을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이름 없이 ‘위대한 수령님’은 4번, ‘위대한 장군님’을 3번 언급했을 뿐이다. 올해는 이런 호칭도 모두 흔적을 감췄다. 남 교수는 “김일성ㆍ김정일 사진은 이들이 과거 인물이라는 점을 상징하는 장치”라며 “김정은이 그림자 정치에서 탈피하고 확실한 ‘자기 정치’를 시작한 점을 과시했다”고 분석했다.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경제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북한 신년사에서 언급된 경제 관련 용어 변화 [박용한]

 
이런 감소 추세와 달리 경제 관련 언급은 대폭 늘어났다. 김 위원장의 집권 직전인 2012년에 9번 수준이었는데 2013년부터 15~20번 사이를 오르내리다 지난해 32번에 이어 올해 38번으로 많이 늘어났다. 북한은 올해 신년사 모두에 ‘병진노선의 위대한 승리’를 강조했다. 핵무기 보유를 기반으로 경제 발전에 매진한다는 전략이다. ‘부강조국 건설의 더 높은 목표’와 ‘경제 건설 총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박용한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park.yong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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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