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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페이스북·보쉬가 고객…기술 앞세운 ‘초격차’ 벤처들

박사 창업 벤처 ‘히든 챔피언’이 되다
압도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박사들이 창업했다.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은 여느 벤처의 3배가 넘었다. 이를 통해 경쟁사와 기술 격차를 점점 벌렸다. 삼성전자가 내세우는 ‘초격차 전략’과 비슷하다. 10년 넘게 꾸준히 밀어붙인 전략은 결실을 봤다. 매출이 한 해 40%까지 증가하고 있다. 사업과 R&D 글로벌 네트워크도 갖췄다. 제조업체여서 일자리 늘리기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벤처기업 파크시스템스·인바디·고영테크놀러지 얘기다. ‘초격차 벤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강소기업들이다. 이런 기업을 일궜건만, 창업자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벤처를 통해 혁신과 성장을 이루기에 아직 한국은 제도가 미흡하고 토양이 척박하다.”
 
#파크시스템스는 원자현미경(AFM·Atomic Force Microscope)을 만드는 회사다. 원자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배율이 높은 현미경이다. 일반 광학현미경은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정밀한 전자현미경으로도 꿈꿀 수 없는 배율이다.
 
파크시스템스 박상일 대표(왼쪽 둘째)가 원자현미경을 점검하고 있다. 대표는 모두 박사 창업자다. [광교=최승식 기자]

파크시스템스 박상일 대표(왼쪽 둘째)가 원자현미경을 점검하고 있다. 대표는 모두 박사 창업자다. [광교=최승식 기자]

이 회사는 박상일(60) 대표가 1997년에 세웠다. 그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자현미경은 박사 과정에서 연구했던 분야다. 그걸 바탕으로 창업했다.
 
처음 “기업을 차리겠다”고 했을 때, 가족을 비롯해 주변에서 돌아온 반응은 “제정신이냐”였다고 한다. 안정적인 교수 자리 놔두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서울대 은사조차 “곧 모교에서 교수를 뽑는다. 얼른 응모나 해라”며 만류했다. 박 대표도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하지만 달리 마음먹었다. “교수는 안전한 탄탄대로다. 그래도 그보다는 기업을 차려 일자리를 만드는 게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엔 주로 연구실에 납품했다. 산업용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아 성장이 더뎠다. 그러다 반도체가 점점 정밀해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원자현미경이 아니고서는 회로를 검사하기 힘들게 됐다. 그 시장을 뚫은 게 2015년이다. 국제 공인 시험에서 경쟁 외국업체를 제쳤다. 경쟁사 제품은 수십 번 사용하면 배율이 떨어져 부분품을 교체해야 하는 반면, 파크시스템스의 것은 1000번을 써도 배율에 변화가 없었다. ‘비접촉 방식’이라는 독자 기술이 이룬 성과다.
 
해외 반도체 업체들이 파크시스템스 제품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2018년 11월엔 삼성전자와 공급 계약을 맺었다. 반도체 업체뿐 아니라 페이스북·코카콜라·롤렉스 등도 파크시스템스의 고객이다. 페이스북은 가상현실용 안경 코팅, 코카콜라는 캔·페트병 내부 코팅의 품질을 검사하는 데 파크시스템스 제품을 쓴다. 해외 시장이 커지면서 미국·일본·중국·독일 등 세계 곳곳에 현지 법인을 세웠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파크시스템스의 매출이 2018년 460억원으로 전년보다 40%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가파른 성장세다. 박상일 대표가 꼽는 비결은 ‘인재’다. 이리저리 뛰면서 인재를 그러모았다. 특히 유영국(46) 전무가 합류한 게 큰 힘이 됐다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소재) 물리학 박사인 유 전무는 박사 과정 중에만 세계 최고 학술지 ‘네이처’에 논문 두 편을 게재했다. 국내에서 열린 나노과학 심포지엄에서 박상일 대표를 만난 뒤 마음이 끌려 2005년 파크시스템스에 합류했다. 그 뒤 “세계 톱 클래스가 오는 회사”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한다. 병역 특례로 파크시스템스에서 근무하던 석·박사들도 계속 남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래도 박 대표는 여전히 인재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는 “스톡옵션 등 인재를 벤처로 끌어들이는 수단에 여전히 제한이 많다”며 “이런 제도를 확 바꿔야 벤처가 융성하고 경제 체질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서울 강남구 논현동 8차선 대로변의 10층 건물. 대기업·중견기업이 아닌 의료기기 벤처가 주인이다. 체성분 분석기 세계 1위 업체인 ‘인바디’가 바로 그 벤처다. 체성분 분석기란 몸 안에 지방이나 근육이 얼마나 있는지 측정하는 장비다.
 
인바디 차기철 대표. 대표는 모두 박사 창업자다. [사진 인바디]

인바디 차기철 대표. 대표는 모두 박사 창업자다. [사진 인바디]

1996년 인바디를 세운 차기철(60) 대표는 공학도 출신이다.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에서 박사를 밟았다. 체성분 분석은 하버드대 박사후과정 때 깊이 연구했다. 누구보다 체성분 분석기를 잘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차 대표도 반대에 부닥쳤다. 부친이 사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 모친과 아내가 뜯어말렸다. 그래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기에” 창업했다. 지금은 연 매출 10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영업이익률은 25%를 넘는다. 벤처 평균(4.2%)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주 고객인 병원과 피트니스센터에서 프리미엄 제품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미국프로농구(NBA) LA 레이커스도 선수 관리용으로 이 회사 제품을 쓴다. 해외 직원(300명)이 국내 직원(200명)보다 많고, 수출 단가가 국내 판매가 보다 35%가량 비싸다. 차 대표는“미국 의료기기 회사도 다른 나라에 수출할 때 50% 정도 더 받는데,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차 대표의 지론은 “천천히, 오래”다. 미래 기술에 투자하면서도 사업 확장은 서두르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배포 크게 도전하는 사업가라기보다 공학도 체질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회사가 지난해 대졸 초임 연봉을 43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올렸다. 웬만한 대기업 저리 가라다. 차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벤처는 인재가 우선이다. 지난해 봄에 지금 강남의 본사 자리로 이사한 것과 연봉 인상은 모두 인재를 끌어들이려는 조치다. 회사 경제력을 넘어서지 않는 한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한 것이다.”
 
# 인재 처우에 관한 한 고영테크놀러지(이하 고영)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회사다. 400여 명 국내 전체 직원의 절반 가까운 약 200명이 R&D 인력이다. 직원 평균 연봉은 8300만원(2017년 사업보고서)이다. 평균 근속 연수가 5년인데도 그렇다. “최고 기술 인력을 데려오기 위해 걸맞은 보수를 정한 뒤 경영직 연봉도 비슷하게 맞췄다”라는 설명이다.
 
고영 고광일 대표. 대표는 모두 박사 창업자다. [사진 고영]

고영 고광일 대표. 대표는 모두 박사 창업자다. [사진 고영]

고영의 주 제품은 전자회로 3차원 검사 장비다.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로봇공학을 전공한 고광일(61) 대표가 2002년 설립했다. 동기는 ‘오기(?)’에 가깝다. 당시 로봇공학 분야는 선진국에 20~30년 뒤졌었다는 게 고 대표의 진단이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에서도 연구 성과가 잘 나지 않아 툭하면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고 대표는 “그럴 바에야 엔지니어가 스스로 기업 만들어 승부해 보자는 생각에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 당시 월드컵에서 나온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에도 자극받았다고 했다.
 
결국 꿈을 이뤘다. 2차원 표면 검사밖에 못 하던 기술을 3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독일 보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고객이 됐다. 최근에는 미국에 R&D 센터 두 곳을 세웠다. 2018년 매출은 2400억~2500억원으로 추정된다. 지난해에는 전체 직원의 30%가 넘는 100여 명을 신규 채용했다. 고 대표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한 제조업 혁신과 의료 분야로 사업을 넓히기 위해 인력을 확충한 것”이라고 말했다.
 
# 흔히들 “더는 주력 산업과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 어렵다”고 말한다. 벤처와 중견·중소기업이 또 하나의 성장축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하지만 업계 리더들은 “벤처 육성 제도가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스톡옵션이 대표적이다. 스톡옵션이란 주식을 미리 정한 값에 살 수 있는 권리다. 향후 주가가 뛰면 큰돈을 번다. 그래서 당장 월급을 많이 주기 어려운 벤처가 인재를 유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국내 스톡옵션에는 제약이 많다. 스톡옵션 권리를 행사해 주식을 사들일 때 소득세를 내는 것부터 그렇다. 팔아서 돈이 생기는 게 아니라, 살 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인데 세금부터 내야 한다. 요건을 갖추면 나중에 주식을 팔아 돈을 마련해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했지만, 벤처들은 “요건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항변한다. 벤처기업협회 측은 “국내 3만7000개 벤처 가운데 스톡옵션을 발행한 곳은 5%밖에 안 된다”며 “세금 문제 때문에 스톡옵션이 벤처에도, 직원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병역특례인 ‘전문연구 요원’에 대해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많다.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3년 일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2013년부터 대기업에는 배정하지 않고, 벤처와 중소기업에서만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벤처나 중기에서 18개월 일하면 대기업으로 옮길 수 있다. 벤처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18개월을 벤처에서 지낸 뒤 대기업으로 갈아타는 인력이 드물지 않다는 이유다. 병역을 핑계로 회사가 연구 요원에게 부당한 처우를 할 수 있는 만큼, 일터를 옮길 길을 터놓아야 한다는 데는 벤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대체복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대기업이 아니라 벤처나 중소기업으로의 전직만 허용해야 한다는 게 벤처 업계의 입장이다.
 
아직 국내 벤처는 경제의 주축으로 자라나지 못했다. 투자 문제도 있겠지만, 미지근한 정부 정책 또한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벤처기업협회 혁신벤처정책연구소 이정민(49) 부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물이 끓으려면 섭씨 100도까지 온도를 올려야 한다. 20도에서 30도, 40도로 올린다고 끓지 않는다. 벤처 정책도 마찬가지다. 규제를 확 풀지 않으면 스톡옵션 등이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정부는 물 온도를 5도, 10도 올리는 식으로만 제도를 개선한다. 제발 물이 끓어오르도록 제도를 혁신해 달라.”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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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