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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에 물 새는 산막…한순간에 심란함 사라진 이유

기자
권대욱 사진 권대욱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19)
또 한 해가 간다. 산막엔 하얗게 눈이 왔다. 탈도 많고 허물도 많은 우리네 삶, 그 흔적들을 순백의 순결로 덮어준다. 그러니 서설(瑞雪)이요, 아름답다 말하겠다. 산막은 언제나 좋은 곳. 세상이 힘겹고 삶이 우리를 속일 때나, 기쁜 일 있어 나누고 싶을 때도 우리는 산막으로 간다.
 
눈 덮인 산막은 고즈넉하고 장작 난로가 타고 따뜻한 외로움이 있어 좋다. 달빛에 서러움 있고 별빛엔 그리움 있어 더욱 좋다. 궁극의 서러움은 희망일지니 오늘 밤 나는 이곳에서 밝아올 새해를 뜨겁게 맞으려 한다.
 
우리는 모두 눈 덮인 산막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산다. 산막은 있는 그대로 학교다. 애써 공부하려 하지 않고 애써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스승이요, 학생이라 참 많은 것을 가르친다.
 
눈이 내렸다. [사진 권대욱]

눈이 내렸다. [사진 권대욱]

 
한겨울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은 가지치기 좋은 계절이다. 잎새 다 떨군 앙상한 가지들은 군더더기 없는 진실. 나는 집 주변 관리되지 않은 잔가지들을 쳐내고 자르고 옮겨 화덕 옆에 모은다. 무어라 다 쓸모가 있겠거니와 사람이 자기 편의로 그러는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말라.
 
원두막 높이 앉아 빈 들판을 바라보니 적막강산 찬바람 속에 겨울은 제자리. 찬바람 여린 햇살 속에서도 나는 봄을 본다. 도원(桃園)을 본다. 겨울은 그래서 좋다. 모두 비워진 후의 기다림. 더 비울 수 없는 극한. 오로지 희망만이 있는 순수. 이곳에 올 때마다 배움이 깊다.
 
산막에 2주 만에 돌아와 보니
2주 동안이나 못 왔고 그 주도 못 올 일정이라 어느 날 밤 혼자 갔다. 기백이도 보고 싶고 산막도 궁금하고 그래서 한밤에 오긴 왔는데, 산막 앞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논두렁 쪽으로 기울어 한 바퀴가 허공 제비를 하니 움직일 수가 없다.
 
포기하고 집에 들어왔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방은 냉골이고, 물은 얼었는지 나오지 않고, 아래층 쪽방(침실) 천정에서 물 뚝뚝 떨어지고, 서생원 한 분 영면해 계시고…. 참으로 심란, 정말 심란했다. 물이 안 나오니 씻을 수가 있나, 밥해 먹을 수가 있나,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다.
 
침실 천정에서 물이 샌다는 건 2층 어딘가 누수가 있다는 이야긴데, 누수 지점 확인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 설사 확인한다 하더라도 이 엄동설한에 어찌 고친단 말인가. 물이 안 나온다는 건 얼었든지 아니면 모터 쪽 이상이 있든지 둘 중 하나일 텐데. 얼었다면 이곳 특성상 내년 3월 말은 돼야 녹을 테니 그때까지 물 못 쓰면 어쩐단 말인가. 생각이 생각을 낳고 심란이 심란을 낳다 보니 머리가 복잡하고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니 차가 없고, 누수 원인도 밝히지 못하고 그냥 가면 그 불안 어찌할 것인가. 참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 어쩔 수 없다. 날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기다려보자. 이렇게 마음먹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실감 났고 마음을 내려놓으니 모든 부정적 마음이 긍정으로 확실히 바뀌었다. 차는 긴급출동 연락하면 될 것이고, 물 끊긴 원인은 내일 아침 찾아 고치면 될 것이고, 얼어붙어 어쩔 수 없다면 내년 봄까지 기다리면 될 것이다. 2층 물새는 원인도 찾으면 될 것이고 정석대로 고치면 된다.
 
독서당에서의 사색. [사진 권대욱]

독서당에서의 사색. [사진 권대욱]

 
난로 지피고 양동이 받혀놓고 낙수 소리 자장가 삼아 정말 잘 잤다. 아주 푹 자 버렸다. 그날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 사는데 많은 것 필요 없다는 것. 물 한 바가지로 정말 많은 것 할 수 있다는 것. 우린 너무 많은 것에 익숙해 고마움 모르고 살았다는 것. 처처에 가르침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스승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힘, 그것은 긍정이라는 것. 긍정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것.
 
모두 바쁘다 하고 바빠서 여유 없다 하니 그런 줄은 알겠지만, 한가함은 바쁜 중에 오고 바쁨 속의 한가함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한가함의 진수를 보는 것이리라. 무엇 때문에 우린 그리 바쁜가. 학생은 시험 봐 좋은 성적 내려 바쁘고, 사업가는 돈 버느라 바쁘고, 관리는 영전하기 위해 바쁘고, 부모는 자식 때문에 바쁘고, 자식은 앞날 때문에 바쁘다.
 
우리는 왜 이리도 바쁜가.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는 않은가. 남이 해야 할 일 대신하느라 바쁘지는 않은가. 남이 원하는 모습 되기 위해 바쁜 것은 아닌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손님 치른 후 뒷정리를 마치고 원두막 높이 앉아 ‘산 기운 지는 해 더욱 아름답고 나는 새집 찾으니, 이 참다운 삶의 의미 말하려야 이미 말을 잊는다’는 도연명(陶淵明) 시의 한 구절을 읽노라면, 삶이 이럴진대 나 또한 참 쓸데없는 일로 바쁘다 하며 살았다 싶어진다.
 
마음이 돌아갈 곳 있다는 건 축복
이제 겉치장뿐인 바쁨은 뒤로하고 돌아보며 살 때도 되었건만 무슨 미련 그리 많아 떨치지 못하는가. 속세를 벗어나 산림에 은거하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쁜 와중에도 마음이 돌아갈 곳을 찾으라 말하는 것이니. 마음 돌아갈 곳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큰 축복임을 다시 느낀다.
 
고요함 속에서 사물의 움직임을 보고 한가로움 속에서 바쁨을 보아야 비로소 티끌 속세를 벗어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바쁜 가운데에 한가함을 얻어내고 시끄러움 속에서도 고요함을 능히 취할 수 있어야 이것이 곧 안신입명의 공부이다. 오늘 산막의 석양과 새소리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큰 축복임을 다시 느낀다.
 
밑불이 충실하면 커다란 통나무도 활활 탄다. 조직도 같다. 열정의 밑불이 살아 있을 때 통나무와 같은 화두조차도 활활 태울 수 있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나. 그 밑불이 꺼지지 않을까 늘 깨어 있어야 하고, 혹이라도 염려되면 보아라,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타고 있지 않은가.
 
산막의 별 헤는 밤. [사진 권대욱]

산막의 별 헤는 밤. [사진 권대욱]

 
한 겨울밤 부서지는 달빛을 본 적이 있는가. 바람에 스치는 별을 본 적이 있는가. 산막에는 달빛 선연하고 숨은 별은 바람에 스친다. 흰 서리 내린 듯 하얗게 빛나는 산하. 나는 떨치고 나와 차라리 모든 인위의 불을 끄고 선연한 달빛을 벗 삼는다. 독서당이라 꼭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스름 달빛 어린 산하를 바라보며 저 달은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 근본을 생각함도 못지않을 것이다. 무슨 대답이 있겠는가. 그저 성심으로 사는 것 외엔.
 
나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그 꿈 끝나는 날, 그날이 내 죽는 날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꿈꾼다. 바이칼에 가고 싶은 꿈, 바다에 살고 싶은 꿈, 방송인이 되고 싶은 꿈, 회사를 키우는 꿈….
 
이런 꿈들이야 꾸고 이룰 수 있어 좋겠다만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 꾸지조차 못하는 꿈이 하나 있으니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나로부터 자유롭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대자유의 꿈, 무애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이루지 못한다. 꿈조차 꾸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렵다. 이루지 못할 꿈. 그러니 무슨 답이 있겠는가. 그저 성심으로 사는 것 외에.
 
산막은 스승이다. 오늘도 많은 것을 말없이 가르친다.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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