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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안 보이는 신장 면화밭, 마오 군대의 피땀으로 일궜다

윤태옥의 중국 기행 - 변방의 인문학
신장 스허쯔(石河子) 부근의 광대한 면화밭. 20세기의 둔전이라 불리는 병단은 면화를 비롯해 토마토·라벤더·포도·대추와 같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한다. [사진 윤태옥]

신장 스허쯔(石河子) 부근의 광대한 면화밭. 20세기의 둔전이라 불리는 병단은 면화를 비롯해 토마토·라벤더·포도·대추와 같은 대규모 농장을 운영한다. [사진 윤태옥]

신장의 우루무치를 출발해 알타이산맥을 행해 하루 종일 달려가던 길, 어느 한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하얀 것들이 갈색 대지를 뒤덮어 지평선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차를 세우고 보니 면화였다. 스허쯔(石河子) 부근의 광대한 농지가 전부 면화였던 것이다. 신장은 땅이 넓고 인구가 적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초대형 농장들이 많다. 스허쯔를 지나 사완현(沙灣縣)에서는 썰렁한 고추시장을 보았다. 나중에야 그 의문이 풀렸다. 고비에서 고추를 대량으로 말리는 광경을 본 것이다. 고추가 집하되는 사완현 시장에서는 자루가 아니라 화물차에 실린 그대로 거래가 됐다.

신장 점령한 중국 인민해방군
집단으로 전역시켜 병단 조직

거대한 회갈색 불모지 맨손 개간
면화·고추·토마토·라벤더 농장화

진시황부터 시작된 둔전이 뿌리
전역해도 집에 못간 한 서려있어

 
 
전 세계 토마토 케첩 4병 중 1병은 신장산
 
산더미처럼 쌓인 고추를 말리는 광경. [사진 윤태옥]

산더미처럼 쌓인 고추를 말리는 광경. [사진 윤태옥]

토마토 역시 엄청나다. 신장의 토마토 가공량은 미국,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다. 전 세계에 유통되는 케첩 4병 가운데 하나는 신장에서 생산된 것이란다. 이리 카자흐족 자치주에서는 라벤더를 대량으로 재배한다. 6월에는 보라색이 또 지평선을 그려낸다. 중국의 라벤더 95%가 이 지역에서 생산된다. 투루판의 포도나 뤄창의 대추도 사막에 널어 건조한다. 수확기에는 20~30t 화물차들이 줄을 지어 실어 나른다.
 
이런 광경은 자연경관과는 또 다른 감동이다. 노동과 농업의 미학이다. 갈색의 대지 화판에 그린 초대형 유채화다. 하얀 면화, 붉은 고추, 주황 토마토, 보라 라벤더는 하나하나가 색채의 예술이기도 하다. 자연의 색조로 회갈색의 불모지를 치장하여 화려한 현대적 미인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불모의 땅에 이런 대규모 농장을 누가 어떻게 만들고 운영하는 것인가. 신장이 여행객들에게 보여 주는 색채의 미학에는 둔전(屯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중국 고대사에서 언급되던 둔전제가 현대의 신중국에서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장의 생산건설병단(약칭 병단)이 바로 20세기의 둔전이다. 신장을 해방시킨 인민해방군을 집단으로 전역시켜 광대한 불모지를 개간해 대형 농장을 만든 것이다. 농업생산을 통해 불안정한 변방(邊方)을 안정시켜 변방(邊防)을 강화한다는 국가전략이었다.
 
병단은 신장의 특수 행정체계다. 중국의 행정구역은 성-지-현-향·진-촌의 단계로 되어 있다. 병단은 총부-사(師)-단(團)의 군대식 편제이다. 우루무치의 병단 총부는 부성(副省)급이고, 사는 현급, 단은 향급이다. 병단은 14개 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9개 사는 사시합일(師市合一)이다.
 
사 아래 단은 185개에 달한다. 121단과 같은 군대식 편호도 있고, 치타이농장, 베이타산목장과 같은 일반 명칭도 있다. 외지 여행객이 병단의 존재를 직접 보는 것은 교통 표지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규모 농지나 목초지는 물론 유명 관광지 가운데 병단 소유가 적지 않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서 맨손으로 농지를 개간하는 모습. [사진 윤태옥]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서 맨손으로 농지를 개간하는 모습. [사진 윤태옥]

신장의 현대식 둔전, 병단은 신중국과 거의 동시에 시작됐다.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1946년 제2차 국공내전을 일으켰다. 결과는 군사력이 열세였던 마오쩌둥의 역전승이었다. 이때 신장으로 진공한 인민해방군은 제2군과 제6군이었다. 국민당의 신장경비총사령부는 인민해방군에 집단 투항했다. 마오쩌둥은 이 부대를 인민해방군 제22병단으로 개편하여 흡수했다. 원래부터 신장에서 혁명 활동을 하던 신장삼구(三區)혁명민족군도 인민해방군 제5군으로 편입시켰다.
 
내전이 끝나자 신장의 인민해방군은 군 내부에 생산건설병단을 창설했다. 1954년 2·5·6군 상당수와 제22병단 전원을 전역시켜 신장군구 소속의 새로운 생산건설병단을 창설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병단은 1966년까지 158개의 농장과 목장을 보유할 정도였다. 문화혁명 시기에는 폐지되었다가 마오쩌둥 사후인 1981년에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신중국의 병단은 현대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오랜 둔전 역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둔전은 둔간술변(屯墾戍邊)이라 하여 중원의 황제들이 변방에 종종 시행했던 정책이다.  
 
 
진시황, 중원 통일 후 50만 변방으로 이주
 
스허쯔시 신장병단 군간박물관. [사진 신장병 단군간박물관]

스허쯔시 신장병단 군간박물관. [사진 신장병 단군간박물관]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이후 50만을 광둥광시 지역과 오르도스(닝샤와 섬서) 지역에 이주시킨 것이 시작이다. 한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무제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신장 지역을 장악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결과는 지지부진했다. 군대를 변방에 주둔시키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위라는 관직을 두고, 병졸들로 하여금 수로를 내어 농사를 짓게 했다(置校尉 屯田渠犁). 한나라 둔전의 하나가 3편에서 찾아갔던 룬타이이다.
 
이후에도 중원의 통일 왕조는 둔전 정책을 종종 사용했다. 당나라는 톈산 남북에서 둔전을 시행했다.  
 
송과 명 때는 둔전이 없었고 원대에는 미미했다. 청나라는 신장 지역을 직접 통치하려고 둔전제를 강력하게 시행했다. 신장 지역의 준가르부를 평정한 뒤, 투루판 바리쿤 하미 등지에서 둔전을 실시했다. 이 글의 2편에서 이야기했던 시보족의 서천 역시 둔전의 하나였다.  중화민국 이전의 둔전 운영 기간은 한나라 241년, 위진 96년, 수 10년, 당 160여 년, 원 20년, 청 195년 등이다. 합산하면 800년에 못 미치는 기간이었다. 신장에 대한 중원의 영향력이 높았던 시대에 국한된 것이다.
 
중화민국의 둔전은 기복이 심했으나 신중국에서는 병단이란 새로운 체제로 발전했다. 2014년 말 현재 병단 토지는 신장의 4.24%지만, 인구는 12%를 차지한다. 국내총생산(GDP)은 토지와 인구보다 비중이 훨씬 커서 신장의 18.6%에 달한다.
 
스허쯔시에는 신장병단 군간(軍墾)박물관이 있다. 병단 초기에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서 맨손으로 농지를 개간하는 흑백사진을 보면서, 황제에서 백성으로 시각을 전환했다. 병단이나 둔전은 황제의 위대한 역사인가, 아니면 시대가 불모지에 남긴 민초들의 고된 노동인가.
 
병단 창설의 주축이었던 제6군의 궤적을 더듬어 보면 알 수 있다. 6군의 씨앗은 1929년 장시성 남부에 세워진 중국 공산당의 중앙소비에트에서 태동했다. 이들은 국민당군의 물샐 틈 없는 포위에 질식사를 당할 뻔하다가 1만2500㎞에 달하는 고난의 행군(대장정 1934~36년) 끝에 옌안에 도착했다. 살아서 도착한 병력이 5%도 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구사일생의 기적이었다. 시안사변으로 제2의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1937년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팔로군 115사로 재편됐다. 산시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지자 옌안 보위전 등을 치렀다. 그다음 시안을 해방시키고 란저우를 거쳐 신장으로 진공했다. 신중국이 성립하자 당과 국가의 명령에 따라 집단으로 전역하여 그곳의 병단 소속 민간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름답고 위대하면서도 슬픈 대지의 미학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중국 공산당의 혁명은 그들에게 이상이고 희망이었다. 대장정은 유랑에 가까운 고난이었다. 그래도 성공했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웠다. 군복을 벗었으나 불모지에 묶여 이번에는 맨손으로 황무지와 마주했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시대도 견뎌야 했다. 문화혁명이란 광풍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둔전 역시 변방으로 가서 군역과 노역으로 살라는 황제의 명령이었다. 자신의 군대를 보낸 황제는 변방에 깃발을 나부끼게 했다. 그러나 고급관리조차도 가고 싶은 곳이 전혀 아니었다.
 
혁명의 병단이든 황제의 둔전이든 고향을 포기한다는 게 동일했다. 고향을 포기한 결과의 하나가 병단이 만들어낸 농업의 예술, 색조의 향연이다. 고통의 씨앗을 감싼 달콤한 과육을, 화려하게 포장한 과일이 아닌가.
 
역사는 서 있는 자의 발바닥과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르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다. 신장이 보여 주는 대지의 미학도 그렇다. 아름답고 위대하면서도 슬픈 색조다.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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