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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까지 가든 못가든 하산길은 왜 이리 상쾌할까

기자
전새벽 사진 전새벽
[더,오레] 전새벽의 시집읽기(24)
처음에는 잔뜩 웅크린 채 걷다가 나중에는 점점 허리를 펴게 되는 변천의 과정을 담은 진화론 그림. 맨 오른쪽의 허리를 완전히 편 사람의 모습은 적어도 현재로써는 '최종단계'의 상징이다. [중앙포토]

처음에는 잔뜩 웅크린 채 걷다가 나중에는 점점 허리를 펴게 되는 변천의 과정을 담은 진화론 그림. 맨 오른쪽의 허리를 완전히 편 사람의 모습은 적어도 현재로써는 '최종단계'의 상징이다. [중앙포토]

 
진화론을 상징하는 그 그림을 다들 아실 거다. 처음에는 잔뜩 웅크린 채 걷다가 나중에는 점점 허리를 펴게 되는 변천의 과정을 담은 그림 말이다. 그것의 맨 오른쪽에는 허리를 완전히 편 사람의 모습이 있다. 직립은 이렇게, ‘최종단계’의 상징이다. 적어도 현재로써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직립보행 때문에 인류가 미숙아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똑바로 선 자세에서는 배가 아주 부풀어 오를 때까지 버틸 수가 없어 다 자라지 않은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걸어 다니는 다른 포유류들을 보라. 우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로 세상에 나오는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일까. 모두가 무엇이 되려고 너무 애쓴다. 그리고 경쟁한다. 마치 모두가 주연 배우가 되려고 애쓰는 연극반의 풍경 같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쳐 대학생 역할을 맡았고 지금은 회사원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남편이라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으니 가끔은 파김치가 되기도 한다.
 
그런 얘기를 하면 누군가는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한다. 나도 가고 싶다. 그런데 올해 남은 휴가도 없고, 각종 예약과 일정을 짜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싶지도 않다.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지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지친다며 불평만 하던 최근, 어떤 분이 쓰신 등산예찬을 읽게 되었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글을 연재하고 계신 한의사 윤경재 원장의 글이었다. 그것을 읽고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냈다. 해외여행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환기할 수 있다는 걸, 그저, 주말을 이용해 산에 가면 된다는 걸.
 
서울 청계산 등산로 모습. 과거 내게도 매주 청계산을 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극심한 취업난을 뚫고 회사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기의 파이팅 덕분일 것이다. [중앙포토]

서울 청계산 등산로 모습. 과거 내게도 매주 청계산을 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극심한 취업난을 뚫고 회사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기의 파이팅 덕분일 것이다. [중앙포토]

 
과거, 내게도 매주 청계산을 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친구를 따라갔다. 하지만 등산이 심어주는 투지에 매료되며 곧 매주 산에 오르게 됐다. 극심한 취업난을 뚫고 회사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기의 파이팅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막상 회사에 다니면서는 주말을 자꾸 누워서 보내게 됐다. 일어나는 게 귀찮았다. 그렇게 나는 직립을 포기하고 와식(臥食) 생활을 택했다. 근육은 퇴화하기 시작했고 체중은 불어났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떠오르질 않으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없었다.
 
윤경재 원장의 글에 그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등산하면 평소 하지로 쏠려 있던 혈액이 돌며 환기효과가 일어난다고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떠오르는 건 그 덕분이라는 것이다. 뭐야, 그런 것이었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상한 상상을 하곤 했다.
 
다들 잡념을 떨쳐 버리러 산에 가니까, 등산로에 한가득 버려진 그 잡념들이 다른 등산객들에게 달라붙기도 하는 것이라고. 물물교환 장터에서 곧잘 그러한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잡념에 불과한 것이 나에게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고.
 
윤 원장의 글을 읽고,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땀도 좀 흘리고 싶었고, 무엇보다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최근 있었던 부부싸움, 그리고 회사 동료와의 마찰로 머리가 복잡했다. 등산로 초입에 도착해 몸을 풀며, 나는 등산이 두 고민 중 한 가지라도 해결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숨이 가쁜 구간을 지나 중턱쯤 오르자, 의외로 문제는 둘 다 해결되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서운케 한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서운한 일이었다. 앞의 것은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이었고, 뒤의 것은 용서하면 될 일이었다. 언제나 넉넉한 산은 그런 것들을 알려주기도 했다. 문득, 좋아하는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상수리나무. 시인은 상수리나무를 가리켜 '직립의 고독이라고 말한다. 평생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존재. 사람도 전부 전부 '직립의 고독'인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중앙포토]

상수리나무. 시인은 상수리나무를 가리켜 '직립의 고독이라고 말한다. 평생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존재. 사람도 전부 전부 '직립의 고독'인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중앙포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사는 게 바빠 지척에 두고도 십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곳 상수리나무라는 직립의 고독을 만나러 갔지 고독인지 낙엽인지 죽음인지 삶인지 오래 묵은 냄새가 푸근했지
-안현미, 「상수리나무」 부분. 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 2014)』에 수록.
 
시인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일단 나가서 걸으면 누구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는 걸. 설사 용서할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뚝 선 상수리나무를 만났다.
 
한편 시인은 상수리나무를 가리켜 ‘직립의 고독’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홀로 우뚝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한 가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직립보행 때문에 미완성으로 태어나, 평생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존재. 사람도 전부 ‘직립의 고독’ 인 것 아닌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날 죽음이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배봉산 근린공원에 갔지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아이는 바퀴를 굴리며 혼자 놀고 있었지 어차피 잠시 동안만 그렇게 함께 있는 거지 백 년 후에는 아이도 나도 없지
-같은 시, 부분
 
삶이 이어지는 내내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지만,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죽음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나 언젠가는 사자(死者)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런데 시인, 그 죽음이 꼭 ‘다음’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산으로 가, 죽음이 지금이면 안 되는지를 묻는다. 이 시인, 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것인가. 무슨 일이길래 죽음을 앞당기고 싶어하는가. 모를 일이었지만,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오죽하면 시를’ 쓰겠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죽음을 앞당기고 싶을 만큼 마음이 괴로웠던 시인, 결국 살아서 시도 썼고 시집도 냈다. 독자를 안도하게 하는 이 반전은, 그녀가 그곳으로 갔으므로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직립의 고독들이 가진 온갖 쓸쓸함과 절망을 품어주는, 산으로.
 
시인들에게만 유독 그런 것은 아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괴롭다.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라고 사회는 다그치는데, 밑에서는 거대한 중력이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력으로부터 자꾸 도망친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는 그 도망의 흔적이다. 하지만 산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 자신의 체중을 짊어지고 한 걸음씩 정직하게 나아가야 한다. 나아가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무등산의 설경. 등산하다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정상까지 가면 그에 대한 보상이 기다린다. 상쾌한 기분과 함께 '해냈구나, 다른 것들도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김상선 기자

무등산의 설경. 등산하다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정상까지 가면 그에 대한 보상이 기다린다. 상쾌한 기분과 함께 '해냈구나, 다른 것들도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김상선 기자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정상까지 가면 그에 대한 보상이 기다린다. 상쾌한 기분과 함께 자신감이 차오른다. 해냈구나, 그렇다면 다른 것들도 능히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다. 한편 중턱쯤에서 포기한 날도 의미가 없지 않다. 완주를 포기한 채 길목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자면 돌연 웃음이 나는 것이다.
 
이깟 산하나 다 오르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별것 아닌 존재인가. 그리고, 그 별것 아닌 존재가 품은 고민이란 건 또 얼마나 하찮은 일들일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괜히 고민했다 싶어 허탈함 마저 밀려오기도 한다.
 
자신감을 얻었든 허탈함을 얻었든, 하산할 적에 그 기분은 모두 유쾌함이 된다. 등산을 막 마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두 조금씩 들떠 있다. 아마, 맛있는 밥 먹을 생각 때문일 것이다. 평소 좋아하는 해장국 집으로 발을 돌리며, 나도 조금씩 들뜬 기분을 느꼈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아 산으로 갔는데 고작 밥 생각에 웃으며 내려오다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유쾌함은 희망을 불러온다. 앞으로 마주할 일들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대책 없는 희망이다.
 
그 희망 한 조각 얻기 위해, 스스로가 직립의 고독이란 생각이 드는 어떤 날, 나는 산으로 간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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