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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마지막 사랑'은 조세핀 아닌 이 여성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
나폴레옹에게는 세 명의 중요한 여인이 있었다. 첫 번째 여인은 조세핀이다. 그녀는 나폴레옹보다 6살 위의 두 아이 엄마였는데, 첫 남편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 그 후 고위관리의 정부로 살아가다가 젊은 나폴레옹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육체적 관능미로 나폴레옹을 사로잡았지만 그와 결혼한 이후에도 그녀는 정숙하지 못했다.
 
두 번째 여인은 조세핀과 이혼하고 결혼한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루이즈였다.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 왕관을 자신의 2세에게 씌우겠다는 야심에 정략적으로 선택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폐되어있는 동안 자신의 보좌관과 놀아났다.
 
세 번째 여인은 정식으로 혼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에게 순정을 주었다. 그녀는 폴란드 출신의 마리아 발레프스카였는데 바로 프레데릭 쇼팽의 아버지, 미코와이가 가르치고 키운 그의 제자였다. (본 시리즈 3편 참조)
 
마리아가 태어난 윙친스키 가문은 폴란드에서 16세기부터 유명했던 명문가였다. 그녀의 아버지 마테우스 윙친스키는 미코와이와 함께 코스치우스코 봉기에 참전해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다쳤고 전쟁이 끝나고 1년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내 에바 윙친스카 부인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미코와이 쇼팽을 가정교사로 들였다. 집안의 큰딸 마리아(1786~1817년)는 그때 9살이었다. 미코와이는 5년간 그녀를 가르쳤다. 그때는 그녀가 뒤에 그렇게 유명인사가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마리아는 14세에 바르샤바의 한 성당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고향 집을 떠났다. 학교를 마쳤을 때 이미 마리아는 빼어난 미모로 눈에 띄었고 학교 교사는 그녀가 영리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상냥한 성격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고 평했다. 그녀가 성당 학교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미코와이는 스카르벡 백작가정으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
 
마리아 발레프스카(1812),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erard) 그림, 폴란드 빌라노프의 존 3세 궁전 박물관(John III’s Palace Museum at Wilanow) 소장. ⓒ공개도메인 [사진 위키피디아]

마리아 발레프스카(1812),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erard) 그림, 폴란드 빌라노프의 존 3세 궁전 박물관(John III’s Palace Museum at Wilanow) 소장. ⓒ공개도메인 [사진 위키피디아]

 
어머니 에바의 생각에, 가장을 일찍 잃고 넉넉하지 않게 살던 집안에 부와 명예를 다시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유한 귀족가문과 혼맥을 맺는 것이었다. 딸은 흠잡을 때 없는 신붓감이었다.
 
폴란드인에게는 악명 높았으나 러시아에서는 전쟁 영웅인 수보로프 장군의 젊은 조카가 딸에게 청혼했다. 어머니는 적대국 청년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바 부인은 대신 폴란드왕실의 시종으로 부유했던 아나스타치 발레프스키 백작과 마리아를 결혼시키려 했다. 청혼이 거절되었지만 러시아의 젊은이는 여전히 미련을 못 버렸다.
 
아버지가 맞서 싸웠던 적국의 19세 청년과 조국의 부유한 68세 귀족이 선택지에 있었다. 맏딸로서 가정에 대한 책임까지 고려했던 그녀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발레프스키 백작은 윙친스카 집안의 빚을 갚아 주었다. 백작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18세의 부인을 파티마다 데리고 다녔다.
 
1806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점령하고 있던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제압하고 바르샤바에 입성하였다. 폴란드인은 나폴레옹이 지도에서 사라졌던 폴란드를 다시 세워 줄 걸로 기대했다. 온 나라가 구세주를 맞듯이 그를 환영하는 가운데 많은 폴란드 유력인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발레프스키 백작도 바르샤바로 가서 그를 영접하였다.
 
나폴레옹을 환영하는 공식 무도회에 발레프스키 백작은 젊은 마리아를 데려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미모의 마리아는 무도회장에서 돋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세련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그녀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친 사람은 미코와이였다. 나폴레옹은 마음을 빼앗겼다. 둘은 같이 춤도 추었다.
 
서재의 나폴레옹(1812),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그림, 위싱턴의 National Art Gallery 소장. ⓒ공개도메인 [사진 위키피디아]

서재의 나폴레옹(1812),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그림, 위싱턴의 National Art Gallery 소장. ⓒ공개도메인 [사진 위키피디아]

 
무도회 다음날 정오, 큰 마차가 발레프스키 백작의 숙소 앞에 멈춰 섰고 나폴레옹의 부하 장수 뒤록 장군이 화려한 꽃다발과 황제의 푸른 인장이 찍힌 양피 봉투를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양피 봉투에는 나폴레옹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편지에는 “내 눈에는 당신만 보였다. 나는 당신만을 우러러보고 당신만을 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마리아는 뒤록 장군에게 답장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뒤록 장군은 다음날도 편지를 들고 왔다.
 
셋째 날의 편지는 비굴한 정도였다. “이 가련한 마음을 불쌍히 여겨 제게 와준다면 나는 당신의 조국을 더욱 소중히 지켜 주겠소”. 나폴레옹이 마리아에게 빠졌다는 소문은 빨리 퍼졌다. 무도회에서 나폴레옹의 눈길은 오직 한 군데만 멈췄었다. 폴란드의 유력인사, 애국지사, 심지어 그녀의 남편까지 폴란드를 위해서 나서야 한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밤이면 나폴레옹의 숙소로 갔다.  남의 눈은 피하고 싶어 해가 뜨기 전에 반드시 돌아왔지만 그녀와 나폴레옹의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원정길에 올랐을 때도 그녀를 데려갔다. 프러시아의 핀켄슈타인 성에서 둘이 보낸 3개월은 나폴레옹에게 있어서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활력 넘친 기간이었다. 그녀도 나폴레옹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리아는 폴란드 독립의 필요성을 계속 호소했고 그 덕인지 마침내 바르샤바와 그 인근에 폴란드인에 의한 자치를 허용하는 바르샤바 공국이 설립되었다.
 
나폴레옹에게는 큰 꿈이 있었다. 당시 신성로마 제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오스트리아와 통합하여 프랑스-오스트리아 통합 황실의 왕관을 자신의 후손이 이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후 조세핀과의 사이에는 2세가 없었다. 조세핀에게는 전 남편에게서 얻은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나폴레옹의 출산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많았고 그 자신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쇤브룬 궁전의 모습. 나폴레옹이 쇤브룬 궁전에 머물 때 마리아가 임신을 알렸다. 이후 나폴레옹은 마리아가 자신의 아이를 낳자 신혼여행 중이었음에도 금화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중앙포토]

쇤브룬 궁전의 모습. 나폴레옹이 쇤브룬 궁전에 머물 때 마리아가 임신을 알렸다. 이후 나폴레옹은 마리아가 자신의 아이를 낳자 신혼여행 중이었음에도 금화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중앙포토]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에 머물 때 마리아도 같이 있었다. 이때 마리아가 임신을 알렸다. 마리아가 자신의 출산 능력을 입증해 주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기뻤다. 2세가 생기지 않은 것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황후 탓이라고 확신한 그는 즉각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대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가의 딸 마리-루이즈와의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이 결혼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의 계승권도 따라왔다.
 
출산을 위해 폴란드로 갔던 마리아가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 신혼여행 중이었음에도 나폴레옹은 금화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나아가 그녀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그녀의 남편에게 이름을 물려주도록 요청하여 아이 알렉산더는 발레프스키 성(姓)을 물려받았다.
 
마리-루이즈와 결혼한 후에 나폴레옹은 마리아를 만나는 것을 자제했지만 그녀와 아이를 파리로 불렀고 그녀에게는 파리에 저택을, 그리고 그녀가 낳은 제 아들에게는 작위와 함께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큰 영지를 물려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리아는 폴란드 법정에 발레프스키 백작과의 결혼 무효 소송을 냈다. 사유는 집안의 강요로 이루어진 결혼이라는 것이었다. 법정은 예외적으로 신속하게 마리아의 손을 들어 주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나폴레옹의 시대는 급속히 저물었다. 그가 엘바 섬에 유배되었을 때 마리아가 그곳까지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유일한 법적 아들의 왕위계승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루이즈를 의식했다. 마리아는 그녀의 애정행각을 알고 있었지만 조용히 돌아섰고 작별할 때 그에게 반지 하나를 주었다. 그 반지에는 “당신이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줘요”라고 새겨져 있었다.
 
파리에 홀로 남은 마리아를 나폴레옹의 조카 도르나노 장군이 보살펴주었다. 도로나노는 마리아에게 청혼했다. 법정의 결혼 무효 판결에도 불구하고 성당의 법이 마음에 걸린 마리아는 발레프스키 백작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도르나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도르나노의 아들을 낳은 후 임신 중독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는 31세였다. 임종을 앞두고 쓴 회고록에서 그녀는 나폴레옹에게 간 것은 조국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라고 기술하였다.
 
마리아가 낳은 나폴레옹의 아들은 나폴레옹 3세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루이즈가 낳은 나폴레옹의 아들은 병약해서 21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 알렉산더는 나폴레옹의 후손을 현재까지 남긴 유일한 혈육이었다.
 
도르나노 장군과의 사이에 얻은 그녀의 마지막 아들의 후손인 시슬리 창업자 위베르 도르나노. [중앙포토]

도르나노 장군과의 사이에 얻은 그녀의 마지막 아들의 후손인 시슬리 창업자 위베르 도르나노. [중앙포토]

 
이에 대한 의혹은 2013년에 알렉산더의 후손과 나폴레옹의 막내동생의 후손이 유전자 검사를 받음으로써 불식되었다. 도르나노 장군과의 사이에 얻은 그녀의 아들 후손은 화장품 회사 시슬리(Sisley)를 설립했고 현재까지 소유하고 있다.
 
마리아를 알았던 한 여류인사는 그녀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균형 잡힌 몸매에, 금발 머리, 희고 예쁜 피부, 매우 상냥한 미소를 가졌다. 촉촉한 음성은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 동정심이 우러나오게 하였으며, 겸손하고 잘 제어된 행동거지에 옷차림새는 검소했다. 그녀는 남편을 편안하게 만들고 사랑을 끌어내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녀에 대해 “매력적이고 천사 같은 여인이었다. 용모만큼이나 영혼도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손에는 마리아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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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