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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여섯 살 많은 이혼녀 데려 오면 엄마 반응은?

기자
심상복 사진 심상복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14화

병석의 누나 아버지를 두고 생긴 불편한 감정이 저녁 식사도 생략한 채 헤어지게 만들었다. 요양원에서 옥수동 우리 집까지는 1시간 반쯤 걸렸다. 나는 태워줘서 고맙다고 누나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오늘 병원을 다녀왔다고 했다.
 
“네가 해준 카카오택시라는 거, 그거 정말 편하더라.”
“그렇죠? 출퇴근처럼 붐비는 시간만 아니면 기사 딸린 자가용처럼 이용할 수 있어요. 그건 그렇고, 의사 선생님이 뭐래요?”
“이젠 늙어서 암세포도 자라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싶은 거 먹으래. 동네 산책 같이 걷기 운동만 좀 더 열심히 하고.”
“다행이네요. 그래서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울 엄마.”
나는 와락 엄마를 껴안아 드렸다.
“아니,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엄마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까
엄마와 단둘이 산 지 27년 됐지만 나는 그렇게 살갑게 굴지는 못했다. 아버지를 잃은 뒤 충분히 그렇게 해드려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르겠다, 그 이유는. 내가 엄마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도 의지할 피붙이라곤 나밖에 없었지만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모자지간은 아니었다.
 
“엄마, 더는 아프지 마세요.”
“…글쎄 말이다.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니?”
하긴 그랬다. 누군 늙고 싶고, 누군 병들고 싶겠는가. 단지 피할 수 없는 고리니까 그 둘레를 돌다 어느 지점에서 내리면 이승의 종착지가 되는 것이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간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었다. 생물학적으론 옳은 말씀인 줄 몰라도 그건 지나치게 염세적인 시각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참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누나를 떠올렸다.
-여섯 살 많은 이혼녀를 데리고 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절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런 생각을 처음 한 건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대체로 날 믿고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해줬다. 대학을 고를 때나 직장을 선택할 때도 그랬다. 그런데 그런 문제는 엄마가 잘 모르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결혼문제는 그게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 나이면 출산이 어려운 것쯤은 당연히 아실 텐데……. 걱정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 돼 가고 있었다.
 
사실 한 달 전쯤 심리상담사를 하는 대학 선배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선배도 같은 말이었다.
“어머니 입장도 헤아려 본 거야?”
“물론 해 봤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내 선택은 그랬지만 정작 문제는 상대였다. 누나는 결혼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결혼도 한번 해봤고 이혼도 한번 해 봤으니 삶에서 그 이슈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입장이었다.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닌 질대 괜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런 고민을 또 하는 것은 오늘 상황 때문이다. 누나는 왜 갑자기 나를 아버지에게 데려간 것일까. 그동안 마음이 바뀐 것일까, 적어도 무슨 변화가 생긴 것 같았지만 그 속은 알 수 없었다.
 
어디, 오늘 숙제 좀 볼까
요양원 방문 이후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하나 더 생겼지만 글쓰기 수업은 계속되었다. 12월 첫째 화요일 주제는 '문장은 짧게, 글은 쉽게' 였다. 사흘 전 선생님은 오늘 수업을 위해 아무 글이나 내가 직접 쓴 글 하나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통신수단은 여전히 이메일이었다.
 
그날 선생님 강의 요지는 이랬다.
-글쓰기도 버릇이다. 버릇은 쉽게 안 바뀐다. 그래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문장은 길게도, 짧게도 쓸 수 있지만 짧은 게 좋다. 그러면서 한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했다. 둘 중 어느 게 좋으냐는 질문에 86%가 짧은 글이라고 답했단다. 심지어 길게 쓰는 게 취미인 사람도 단문이 더 좋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쉬운 글이 좋은지, 어려운 글이 좋은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고 했다. 이건 거의 100%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자를 지지했다. 어렵게 쓰는 사람도 남이 쓴 어려운 글은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러니 정답은 쉬운 글이다. 무슨 글이든 읽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다. 어렵게 쓰는 사람은 그 내용을 다 소화하지 못한 채 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진짜 실력자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쓸 줄 아는 사람이다.
 
선생님의 수업은 언제나 완벽했다. 나는 작게 손뼉을 쳤다.
“이제, 숙제해온 것 좀 볼까?”
나는 오늘도 깨지겠지 하며, 길지 않은 글 한 편을 내놓았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피할 수 없다. 지혜를 앞세워 다른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부자도, 권력자도 예외가 없다.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거야말로 큰일이 아닐까. 이미 고령화로 인한 사회문제가 무겁게 다가오고 있다. 100세 정도가 아니라 불멸이라면 문제의 차원이 전혀 달라진다. 제한된 자원을 장악하기 위해 매일 죽고 사는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누구는 전쟁 같은 삶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그건 삶이다. 죽음이 없으면 삶이란 단어도 사라지고 만다. 그 자리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이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동체를 생각하고 후손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생명의 유한성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사람은 죽음을 회피하려고 한다. 본능적으로 두렵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일수록 죽음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었어도 건강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가족이 가고 친구가 죽어도 자신은 아닐 것이라고 착각한다. 30대인 나는 그래도 가끔은 죽음을 생각한다. 열한 살에 겪은 아버지의 죽음이 영향을 준 것 같다. 멀쩡하던 분이 어떻게 갑자기 죽을 수 있을까. 그땐 죽음이 뭔지도 몰랐지만 어머니의 통곡으로 그 심각성을 짐작만 했었다.
 
그 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간은 모두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다. 두 죽음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것일까.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적어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따르는 신도들이 2천년이 지나도록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그랬다. 지금도 교회에서 만나는 어머니 지인 중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천국을 소망하는 이들도 있다. 빨리 죽어 천국 가고 싶다는 말이다. 처음 들었을 땐 정말 그럴까 의심했는데 진심이었다.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어느 학자의 얘기를 기독교에서는 비성경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다 읽은 선생님은 상당히 흡족한 표정이었다. 주제는 쉽지 않지만 글은 어렵지 않다고 칭찬했다. 무엇보다 오늘 수업을 의식해서인지 문장 길이가 한입에 딱 넣기 좋다고 했다. 그동안 본 내 글 중 제일 마음에 든다고도 했다.
“글공부는 누구에게 배웠어? 선생님이 누구지? 호호호~~”
“제가 여신으로 모시는 분에게 배웠습니다.”
 
서먹했던 분위기는 그날 선생님의 과찬으로 물거품처럼 잦아들었다. 수업을 마칠 즈음 선생님은 질문이 있다고 했다.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말은 영국의 사회학자 스펜서의 말로 알고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이걸 왜 비성경적이라고 하는 거지?”
“목사님께 물어본 적 있는데, 이 말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종교(기독교)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유일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들었다는 성경 말씀과 완전히 배치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기독교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참자유를 얻게 하는 것이지, 죽음의 공포 정도를 이기기 위한 차원 낮은 종교가 아니라고도 했죠. 그래서 제가 죽음의 공포만 극복하게 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니냐고 했더니 어쨌든 그건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라고 하더군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답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나는 자위했다. 나는 늘 믿음이 뿌리 깊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어느새 뭔가 축적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나는 자신은 한때 절에서 생활한 적도 있어 그런지 여전히 아리송하다고 했다.
“절에서 살았다고요? …언제요?”
“살다 보면 무슨 일도 생길 수 있지…….”
 
누나는 더 이상의 언급을 피했다.
“어쨌든 오늘 글을 보니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걸.”
그녀는 다른 어떤 일보다 내 글이 좋아진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오늘 칭찬도 받았으니 제가 한턱 쏠게요.”
“학생이 좋은 성적을 내면 선생님이 한턱내는 거야. 자, 가자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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