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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가장 큰 사랑은 가정부에게 배웠다

‘로마’ 촬영현장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가정부 클레오 역할의 배우 얄리차 아파리시오. [사진 넷플릭스]

‘로마’ 촬영현장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가정부 클레오 역할의 배우 얄리차 아파리시오. [사진 넷플릭스]

“아버지가 집을 떠나며 우리 가족이 해체된 이야기가 영화의 초점이지만, 1970년대는 멕시코에 민주화 노력이 거세게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실패 이후 멕시코는 여전히 민주화 과정에 있지만, 이 시기 형성된 멕시코의 시대 정신은 후대에도 계승됐습니다.”
 
‘그래비티’ 같은 할리우드 영화로 낯익은 알폰소 쿠아론(57) 감독의 말이다.
 
새 영화 ‘로마’는 그가 17년 만에 모국 멕시코에 돌아가 만든 자전적 작품. 극 중 배경인 70년대는 그의 어린 시절이다. 주인공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아이가 여럿인 중산층 집안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젊은 여성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 분). 감독은 “우리 가족의 상처, 멕시코란 사회가 안은 상처, 전 인류가 안은 상처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캐릭터라 생각했다”며 “클레오의 실제 모델인 가정부 리보 로드리게즈는 어릴 적 내게 가장 큰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영화는 클레오의 시선을 따라 이혼으로 인한 주인집 가족의 상처, 클레오 자신이 겪는 쓰라린 실연에 더해 아픈 시대상을 섬세하게 엮어낸다.
 
감독은 한국 기자들과 화상 회견을 통해 “나로선 꼭 해야만 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래비티’를 마무리할 무렵, 드디어 멕시코로 돌아가 영화를 찍을 때라고 다짐했다. 모든 사고와 창작 과정이 모국어였기 때문에 무척 자유로웠다. 나는 스페인어 중에도 칠랑고를 쓴다. 멕시코시티 출신임을 알려주는 액센트다. 꿈도 칠랑고로 꾼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여러 언어로 연출을 해왔지만 이번엔 어떤 필터도 없이 감성적 뿌리라 할 만한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클레오를 연기한 얄리차 아파리시오는 연기가 처음인 교사 지망생. 감독은 출연진으로 베테랑 배우만 아니라 멕시코 전역에서 실재 인물과 닮은 사람들을 찾아 캐스팅했다. 중산층 가족이 사는 집 역시 실제 감독의 가족이 당시 쓰던 물건과 가구로 채웠다. “사전 리허설된 장면이란 개념을 뒤집고 싶었다”는 그는 촬영 기간 동안 누구에게도 전체 각본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침마다 그날 분량을 간단히 설명했을 뿐. 하루하루 펼쳐지는 실제 인생을 카메라에 담아내듯 108일간의 촬영을 이어갔다.
 
이 가족과 클레오의 일상으로 시작한 영화에는 극심한 빈부 격차,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등이 녹아난다. 당시 멕시코에선 정부 지원을 받은 우익무장세력이 시위대 120명을 학살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영화 속 시위 장면을 촬영한 곳이 바로 이 사건이 벌어졌던 교차로다.
 
어딘가로 떠나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뒤에서 포옹하는 장면. 그 시절 감독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 페페가 대문 앞에서 클레오와 함께 이를 지켜본다. [사진 넷플릭스]

어딘가로 떠나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뒤에서 포옹하는 장면. 그 시절 감독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 페페가 대문 앞에서 클레오와 함께 이를 지켜본다. [사진 넷플릭스]

감독은 “멕시코와 한국은 경제적으론 다르지만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는 정서적 공감대가 있다. 정재계 고위층의 부정부패로 인한 갈등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도 유사하다. 한국영화에서 이런 테마가 반복되는 것을 보며 깊이 공감해왔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한국에서 온 태권도 사범이 진압대를 훈련시키는 장면도 등장한다. 감독은 “당시 멕시코에서 반정부 시위를 제압하는 군사 훈련의 일부로 태권도가 활용됐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통제하고 사회를 억압하는 틀이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그려냈다”고 설명했다.
 
영화에는 흑백 영상과 더불어 일상의 소음까지 밀도 높게 구현한 사운드가 두드러진다. 감독은 “사운드를 잘 활용해 영화에 비친 시공간의 미묘한 느낌들을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관객에게 온전히 체험시키는 게 이 작품의 목표였다”고 말했다. 또 “현대의 유령이 과거로 돌아가 그 당시를 관찰하는 듯한 관점을 구현하고자, 흑백 필름과 구분되는 현대적인 디지털 흑백화면으로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영화의 연출과 각본·편집은 물론 촬영까지 직접 맡았다. ‘그래비티’ 등 세 차례나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은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가 여러 사정으로 하차하면서다. 쿠아론 감독은 “원래 촬영으로 경력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학교에서도 촬영을 전공했고, TV에서 촬영 일을 할 때부터 루베즈키가 내 어시스턴트로 손발을 맞춰왔다. 그가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보고 직접 촬영하라고 설득하더라. 이전 작품도 초반 며칠은 제가 직접 촬영하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재밌게 했다. 각본 쓸 때 쏟아부은 제 모든 생각을 다른 이에게 설명할 필요 없이 곧바로 촬영할 수 있어 이번 영화엔 더 잘 맞았다.”
 
평범한 일상에 자연스레 새겨지는 시대상, 비극을 관통하는 삶의 철학, 영화가 빛과 사운드의 예술임을 아름답게 입증하는 장면들을 보노라면 이 감독에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두고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제작한 이 영화는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에 입성하지 못했다. 넷플릭스 공개와 더불어 국내 극장가에 소규모로 개봉해 상영 중이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이후 넷플릭스 영화는 칸영화제가 경쟁부문 초청도 거부한 상황. 반면 올해 9월 베니스영화제는 ‘로마’에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안겨 화제가 됐다.
 
감독은 “이 스토리에 제일 먼저 관심을 가져준 넷플릭스와 손잡은 것인데 결과적으로 일반적인 극장 개봉보다 큰 주목을 받게 됐다. 이상적으로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주길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소규모 작품을 즐기기 위해선 넷플릭스 같은 신규 플랫폼이 맞지 않나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극장이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장악당한 현실”을 지적하며 이렇게도 말했다. “한때는 극장에도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 아트하우스 영화가 다양하게 공존했다. 대자본에 떠밀려 극장에서 선택의 폭이 좁아진 지금은 오히려 신규 플랫폼에서 이런 다양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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