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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지정학적 경쟁자에게 중동 넘기는 꼴” 트럼프 시리아 미군 철수에 서방세계 경악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일 내전 중인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갑자기 발표하면서 충격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5년 시리아 동북부 터키 국경지대에 2000여 명의 지상군을 파병해 유지해왔다. 이들은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SDF)의 훈련을 주로 맡아왔다. 
시리아 북서부에 주둔한 미군이 쿠르드족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SDF) 무장대원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누스]

시리아 북서부에 주둔한 미군이 쿠르드족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SDF) 무장대원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누스]

 
트럼프는 “IS를 상대로 승리했다”며 이를 철군 명분으로 내세웠다. 시리아 철군은 트럼프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이어 20일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주둔 미군의 절반인 7000여 명의 철수를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CNN은 트럼프의 철군 결정을 두고 “세계 최강 군사력의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지역에서 발을 빼기로 한 이 결정은 동맹을 버리고 한 지역을 지정학적 경쟁자에게 넘기는 것”이라며 “세계사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비난했다. CNN은 “트럼프가 취임한 뒤 2년 동안 온갖 혼란, 폐해, 무책임을 다 봐왔지만, 그중에서도 최근 72시간 동안 벌어진 일(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철수와 병력 감축)은 역사적”이라고 대놓고 비꼬았다.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독단적으로 결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이에 반발해 사임한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 [로이터=연합뉴스]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독단적으로 결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이에 반발해 사임한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 [로이터=연합뉴스]

 
가장 큰 문제는 철군 결정 과정이다. CNN에 따르면 트럼프는 미군 수뇌부와도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철수를 결정했다. 특히 14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시리아의 쿠르드 민병대를 상대로 군사행동에 나서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통화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정세에 대한 트럼프의 형편없는 판단력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의 기갑 차량. [AP=연합뉴스]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의 기갑 차량. [AP=연합뉴스]

 
BBC는 터키가 자국과 시리아·이라크·이란에 흩어져 사는 쿠르드족이 세력을 확대해 독립국을 건설하는 시나리오를 경계해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군은 IS 격퇴를 위해 쿠르드족 민병대를 지원한 것은 물론 이들을 훈련하기 위해 지상군 병력을 파병했다. 쿠르드족의 협조를 얻어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시리아에서 펼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족은 상당한 희생을 감수했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미군 수뇌부도 아닌 에르도안의 말만 듣고 시리아 주둔 미군이 위험하다며 철군을 결정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철군 결정에서 소외된 것으로 알려진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은 20일 “동맹 없이는 미국의 이익을 지킬 수 없다”며 사퇴 의사를 밝히는 트럼프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IS 격퇴를 위한 글로벌 동맹 담당’ 특사인 브렛 맥거크도 22일 사임 의사를 밝혔다. 미국이 걷잡을 수 없는 리더십 공백 상태에 빠지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동맹 무시’다. 트럼프는 시리아 작전을 함께 펼쳐온 영국·프랑스 등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국과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철군을 명령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3일 유감 의사를 밝히고 “동맹은 반드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르 몽드가 보도했다.  
 
트럼프의 독단적인 결정은 전 세계에 부정적인 신호를 보낼 수 있다. 특정 국가나 세력이 국제사회나 미국 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트럼프 개인과 막후 교섭을 하면서 잘 달래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는 그릇된 신호 말이다. 내년 초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기대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런 방식으로 ‘핵을 가진 북한’을 용인 받으려고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내년 초 무역 갈등 해결을 위한 협상을 앞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국익과 트럼프의 개인적·정치적 이익이 이해 상충의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올해 4월 14일 미국 군함이 발사한 순항 미사일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타격하고 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바샤르 알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공습을 결정했다. [AP=연합뉴스]

올해 4월 14일 미국 군함이 발사한 순항 미사일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타격하고 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바샤르 알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공습을 결정했다. [AP=연합뉴스]

 
아울러 나토 동맹국의 미국에 대한 불신은 더욱 가속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취임 뒤  두 차례에 걸친 나토 정상회담에서 계속 ‘군사비 부담 확대’을 강하게 요구해왔다. 냉전 시대 소련의 서진을 저지하려고 1949년 4월 4일 발족한 나토는 냉전 종식 뒤 대테러전쟁 등을 위한 집단 안보동맹으로 새롭게 유지됐다. 미국이 공짜 안보를 제공해왔다기보다 워싱턴이 서방 세계를 이끌며 상호 안전과 이익을 추구하는 동맹 체제로 진화했다. 트럼프의 동맹 무시는 이런 배경이 있는 나토의 역사와 가치를 대놓고 부정한 셈이 된다. 트럼프는 비용만 생각해 오랜 가치 동맹을 헌신짝처럼 버린 ‘수전노’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이라면 내년으로 창립 70주년을 맞는 나토가 해체 위기를 겪을 우려도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변덕스러운 트럼프가 손바닥 뒤집듯 결정을 번복할 수도 있다. 2017년 유엔총회에서 북한을 향해 ‘불과 분노’를 토하다 올해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친구라고 치켜세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 결정으로 트럼프는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정부군에 대항해 함께 싸우던 쿠르드족과 수니파 반정부군을 대놓고 ‘배신’했다. 미 지상군이라는 방패가 없어지면 쿠르드족과 시리아 반정부군은 터키와 알아사드 정부군의 협공 속에서 설 땅을 잃게 된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미국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면서 독자적인 생존 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테러리즘이 될지, 미국의 적과 손을 잡는 길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신화통신은 "시리아 동북부 전선에서 IS 잔당과 전투를 벌이는 SDF 민병대가 '미국이 등에 칼을 꽂았다'며 울분을 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군의 시리아 철수는 지금까지 시리아에서 알아사드 정부군을 군사적·경제적으로 지원해온 러시아에 결정적인 이익을 안겨주게 된다. 냉전과 소련 붕괴 이후 계속 미국에 밀려온 러시아가 중동에서 첫 군사적·외교적 승리를 시리아에서 거둔 셈이다. 러시아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이 지역에서 지속해서 세력 확대를 노릴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와 손잡고 이 지역에 ‘시아파 벨트’를 구축해온 이란도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다. 
 
가장 큰 승자는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펴온 독재자 알아사드다. 21세기 인류 최대의 학살극이라던 시리아 내전은 결국 알아사드와 러시아·이란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로써 중동 지역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의 가치를 거론할 세력은 설 자리를 잃게 됐다. 전 세계의 독재자들이 미군의 시리아 철수를 보면서 무엇을 배우게 될지도 자명해지고 있다. 아울러 미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불신감이 확대하면 국익과 트럼프의 정치적 이익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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