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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합리적인 사회

얼마 전 외국에서 손님을 한 분 맞았다. 그의 어머니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무작정 밀항하여 아르헨티나에 가서 살다가 결혼을 했단다. 거기서 낳은 그를 이스라엘에 보내 공부시켰다.

그가 재직하는 히브리 대학은 19세기 말 2천년동안 남의 나라들을 떠돌던 유대인들의 염원으로 대학 설립이 제안되어 1918년 개교하였다. 이스라엘 건국보다도 30년이나 먼저 생겼으니 유대인들은 아직 나라도 없는 땅에 대학을 먼저 세웠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히브리대학을 만든 것이 아니라 히브리 대학이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 지성의 자부심이었던 히브리 대학은 아랍 전쟁 중 적들의 표적이었다. 캠퍼스를 옮겨 다니며 끈질기게 공부하고 연구했던 그 대학에서 4명의 이스라엘 총리와 8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유대인 손님은 내게 물었다. ‘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하느냐’. 동석했던 사람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유교 문화권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 표현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그는 부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보수와 더 짧은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일자리를 가지기 위해 일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동기일까?’

필자는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대학 연구실과 국립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이지만 문제의 발굴과 해결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에 있어서 매우 효율이 높다. 그들의 회의에 참여해보면 공격적인 질문 세례와 폭풍 같은 고민, 아이디어로 넘쳐난다. 이른바 잘 나가는 집단일수록 문제 해결 외에 달리 신경 쓸 일이 없다. 구성원 각자가 가진 재능과 전문성, 에너지가 온전히 문제 해결 그 자체에 집중되니 생산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대내외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들의 쓰나미다. 양극화와 저출생, 초고령화, 무역전쟁, 환경오염 등 대부분의 문제들은 어느 나라든 고속성장을 거쳤다면 피하기 어려운 후유증이다. 최근 남혐/여혐 현상이나 세대 간 갈등도 기저에는 실업 문제가 깔려있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고 정교하게 실행에 옮겨야만 지속가능한 발전의 궤도에 올라설 수 있다. 그러자면 고속성장 시대와는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해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문제 해결을 위한 합리적 노력 이외의 다른 것들을 위해 우리 자신의 역량을 소진해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작 문제 그 자체보다 일하는 사람을 더 지치게 하는 것은 곳곳에 만연한 불공정, 독선, 비효율, 불신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이라고 난제가 없는 게 아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합리적 방식으로 헤쳐 나갈 뿐이다. 눈에 띄는 것은 연구 기능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지식 축적과 솔루션 창출이라는 본래 목적 외에, 연구라는 것 자체가 객관성과 합리성에 바탕하기 때문에 임의적이고 불합리한 관행을 경계하는 효과도 있다. 그들이 왜 막대한 자기네 세금을 들여가며 연구기관을 운영하고 우수한 연구자들을 끌어 모으려 애쓰는지 진지하게 곱씹어 봐야 한다.

연구라는 정신적 육체적 노동은 다른 노동과 사뭇 다른 특성이 있다. 첫째, 시간을 정해놓고 하기 어렵다. 실험이 진행 중인데 퇴근 시간이 되었으니 집에 가는 연구자 치고 좋은 연구자는 보지 못했다. 둘째, 무조건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그에 비례하는 결과가 약속되지 않는다. 상대성이론이 탄생했던 정신적 토양은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스위스 베른의 그루텐 산을 자주 등산하며 얻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연구한답시고 책상 앞에 죽치고 앉아 있기보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이 민코프스키 시공간을 떠올리기에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셋째, 연구자에게 보수만큼 중요한 것은 자유와 존중이다. 다른 일들도 그렇겠지만 특히 연구는 연구자로부터 독립성과 명예를 빼앗으면 생명을 잃어버린다. 행정이나 정치와는 사뭇 다른 속성이다.

공공의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유능한 행정이 필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행정 뿐만 아니라 고도의 연구개발 필요성도 증가하고 있다. 지방 분권화가 진행되면서 중앙 정부의 전유물이었던 연구개발 기능이 지방 정부에서도 긴요해지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려면 행정과 연구의 협업은 필수다. 상이한 속성을 가진 행정과 연구 사이에 축적된 이해와 융합의 경험이 국가경영, 지역경영의 성패를 좌우할 자산이 될 것이다.

정택동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장

<중부일보(http://www.joongboo.com)>

※위 기사는 중부일보 제휴기사로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중부일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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