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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테이블 한 번 못 앉은 비건, 美 비장의 대북카드인 이유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1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청사에서 한미 워킹그룹 2차회의를 마치고 나와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1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청사에서 한미 워킹그룹 2차회의를 마치고 나와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스1]

북ㆍ미 협상 교착국면에서 마음이 답답한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 뿐만이 아니다. 협상 대표이면서도 협상 테이블에는 정작 한 번도 앉지 못한 스티븐 비건의 속도 타들어간다. 그가 국무부의 대북 특별대표(US Special Representative for North Korea)로 임명된 건 지난 8월 23일. 임명 후 4개월이 되어가지만 그는 북측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외무상 부상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최 부상이 비건 대표와의 만남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비건 대표의 이번 19~22일 방한에서 주목되는 일정은 판문점 방문이다. 비건 측은 9ㆍ19 남북 군사 합의 후 비무장화가 진행된 공동경비구역(JSA) 현장을 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속내는 분명했다. 자신은 협상 테이블에 앉을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메시지를 북한에 전달한 것이다. 판문점은 지난 6ㆍ12 북ㆍ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측이 막판까지 협상 줄다리기를 했던 곳이다.   
비건 대표와 그의 북한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       [연합뉴스]

비건 대표와 그의 북한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 [연합뉴스]

전날 한국에 입국하면서도 그는 미국 국민이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을 목적으로 북한을 여행하는 경우엔 북한 여행 금지 조치를 풀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 유화 제스처를 보내기 위한 작심 발언이었다. 21일 한ㆍ미 워킹그룹 회의를 마친 뒤엔 기자들에게 “북한의 협상 파트너들과 다음 단계의 협의로 넘어가기를 열망한다(eager)”고 말했다.  
 
비건의 앞길은 그러나 험난하다. 우선 북한이 요지부동이다. 미국이 다양한 채널로 내년 1월 1일 이후 곧 2차 북ㆍ미 정상회담이 열리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으나 북한은 답이 없다.  
 
비건, 非전문가에 ‘어공’ 출신이지만….
비건 대표가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올 추동력을 갖췄는지에 대한 비판도 일각에선 조심스럽게 나온다. 그가 북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국무부 정통 관료도 아니다. 대북 특별대표를 맡기 직전까진 포드자동차의 국제 담당 부회장으로 대관 업무를 봤다. 미 국무부는 그의 임명 소식을 전하면서 “행정부와 의회 및 민간 부문에서 30년 넘게 경험을 쌓았다”고 소개했다. 외교안보 전문이 아니라는 의미로, ‘늘공’(정통 공무원)이 아닌 ‘어공’(어쩌다 공무원, 별정직)’인 셈이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은 기자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청사의 도어스테핑 모습. [뉴스1]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도어스테핑(약식 기자회견)은 기자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청사의 도어스테핑 모습. [뉴스1]

그러나 이런 그의 특징이 약점 아닌 장점이라는 시각도 있다. 비건 대표를 직접 만나본 인물들 사이에서 그런 평가가 많다. 21일 비건 대표를 세 번째로 만난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아이디어도 다양한 데다 성품도 좋은 준비된 대북 협상가”라면서 “역대 미국의 대북 협상 수석대표 중에서 북한과 가장 협상을 잘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외교부 차관보 출신으로 6자회담 수석대표를 지낸 북한 전문가다. 
 
최근 비건 대표와 면담한 또 다른 외교안보 전문가는 익명을 전제로 “북한에만 지식이 한정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장점이 있다”며 “기존의 협상 틀과 북한의 이미지에 얽매인 전문가와 달리 참신한 아이디어를 많이 갖고 있더라”고 말했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정부와 의회, 기업까지 거치며 여러 종류의 다양한 협상을 이끌어본 비건 대표가 북한에겐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며 “북한도 이 같은 점을 알기에 오히려 실무협상을 건너뛰고 트럼프 대통령과 ‘직거래’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건도 북한 핵 문제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가 2007년 제1저자로 공저한 스탠리재단의 논문 주제가 북한ㆍ이란 등의 핵 위협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 “이란ㆍ북한 등지에서 핵폭탄을 테러 집단으로 확산할 경우 미국은 핵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고 썼다. 당시 그는 이미 포드자동차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던 때였지만 핵 문제 등 외교안보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갔던 셈이다.  
 
비건 인생 최대 굴욕의 순간은?  
1963년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그는 미시간대에서 정치학과 러시아어를 전공했다. 외교안보 분야 전문이었던 빌 크리스트 전 공화당 원내대표의 보좌관을 지내는 등 정계와 외교안보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1994년 북ㆍ미 제네바 합의 성사 당시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실무도 담당했다. 정책 결정이나 기획엔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나 북한과의 인연은 일찌감치 시작한 셈이다.  
 
비건은 이후 조지 W 부시 정부에 들어서선 당시 외교안보 브레인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에게 발탁됐다. NSC의 사무국장(executive secretary)과 NSC의 업무 집행 최고책임자(Chief Operating Officer)를 맡아 라이스의 오른팔로 활약했다. 천 전 수석은 “NSC 사무국장은 미국이 당면한 전세계 모든 외교안보 현안과 정보를 보고 받고 우선순위를 추려서 상부에 보고하는 자리”라며 “우리로 따지면 차관급 정도의 무게감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한미 워킹그룹 회의 등을 통해 긴밀히 협의해오고 있다. 양측의 호흡은 상당히 잘 맞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뉴스1]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한미 워킹그룹 회의 등을 통해 긴밀히 협의해오고 있다. 양측의 호흡은 상당히 잘 맞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뉴스1]

비건은 이어 공화당에서 외교안보 전문가로 위상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2008년 대선에선 존 매케인 후보의 외교 자문역을 맡았고 동시에 신속대응팀을 꾸려 세라 페일린 부통령 후보를 보좌하는 역할도 맡았다. 
 
그러나 페일린 신속대응팀은 비건에게 아픈 상처로 남는다. 캐나다의 코미디언인 마르크-앙투완 오데트의 장난 전화 때문이다. 오데트는 생방송 중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흉내를 내며 페일린 캠프 측에 전화를 했고, 그가 사르코지라고 생각한 페일린은 수 분 동안 통화를 했다. 이 대화에서 페일린은 외교안보에 대한 얕은 지식을 드러냈고, 이 통화는 북미 전역에 방송됐다. 당시 전화를 페일린 후보에게 연결해준 당사자가 비건이었다. 
  
비건은 당시 미국 LA타임스에 “내가 속았다”라며 “(페일린 후보를)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한 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내가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됐고, 비건은 트럼프 대통령 정부에 들어와서도 NSC 보좌관 후보로도 거론되는 등, 외교안보에서의 존재감은 계속 인정 받았다. 그러나 페일린 사건은 비건에겐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국과는 악연으로 시작…노련한 협상가  
포드자동차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자신을 고용한 기업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는 악연을 맺었다.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서다. 관련 협상이 한창이던 2011년, 그는 “한국이 자유무역의 원칙이 뭔지 깨달을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강제 조치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2014년 7월 한ㆍ미 FTA 관련 미 상원 청문회에서 미국 자동차 업계를 대표해 한국을 맹비난한 인물도 비건이다. 
 
그러나 그가 뼛속까지 반한 감정을 갖고 있어서 이런 발언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이 부회장으로 있는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수혁 의원은 “협상 경험이 다양한 만큼 협상의 목적을 위해 노련하게 임할 수 있는 인물”이라며 “북한과도 합이 잘 맞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29일 오후 청와대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면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비건 대표가 직접적인 카운터파트가 아닌 임 실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사진 청와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29일 오후 청와대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면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비건 대표가 직접적인 카운터파트가 아닌 임 실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사진 청와대]

비건이 한ㆍ미 워킹그룹이라는 틀을 만들고, 지난 10월 방한 때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과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과 면담을 요청했던 것을 두고 그가 정무적 감각이 뛰어난 행동파라는 평가도 나온다. 직접적 카운터파트인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외교부를 뛰어넘어 행보를 넓게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가 러시아 문제에 정통하다는 점도 북한을 추동할 수 있는 동력으로 보인다. 그는 공화당 모스크바 지부에서 미ㆍ러 관계개선과 함께 구 소련의 경제개혁개방 조치를 연구했다. 앞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두고도 그가 북한에 제시할 수 있는 아이디어의 스펙트럼이 넓을 것으로 보인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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