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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베스트] 현실인 듯 아닌 듯 능청·따듯한 소설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최근 출간된 신간 중 여섯 권의 책을 ‘마이 베스트’로 선정했습니다. 콘텐트 완성도와 사회적 영향력, 판매 부수 등을 두루 고려해 뽑은 ‘이달의 추천 도서’입니다. 중앙일보 출판팀과 교보문고 북마스터·MD 23명이 선정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옥상에서 만나요

옥상에서 만나요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창비
 
정세랑 소설은 ‘스파이더맨’ 같다. 액션 블록버스터라는 게 아니다. 분명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등장하는데 장르문학 같지 않은 리얼리티가 있다는 얘기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그야말로 만화 같은 내용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만화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컴퓨터그래픽 등 특수효과로 진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리얼리티를 구현해내기 때문이다. 그런 특수효과를 동원하지 않는데도 정세랑 소설은 판타지를 현실로 녹여내는 무기가 있다.
 
그 무기는 능청과 따뜻함이다. 이문구 스타일의 쿰쿰하고 의뭉스런 능청이 아니라 상큼하고 정갈한 능청이다. 그러한 능청은 그래서 더 가공할 힘을 지닌다. 일반적인 판타지 소설들과는 다르게 비현실로 도약할 때 도움닫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현실 그 자리에서 바로 비현실로 뛰어오른다. 독자들이 비현실 구간에 진입했음을 깨달을 틈도 없다. 횡단보도가 생겨 불필요해진 지하보도를 폐쇄하지 않은 서울시의 불찰로 흡혈귀가 되고(‘영원히 77사이즈’), 아르바이트하던 공장의 사고로 잘려나간 귀에서 과자가 자라난다(‘해피 쿠키 이어’).
 
능청의 필연적 속성인 유머 역시 모자라지 않다. 생전에 다이어트를 했지만 갑자기 흡혈귀가 되는 바람에 ‘영원히 77사이즈’로 남게 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술에 취한 척 속여 짝사랑하던 남성과 섹스까지 이르는 데 성공하지만 남성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자동 발사’된 송곳니로 남성의 목 아닌 성기를 물게 되며, 결국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빨게 된다. 절정에만 이르면 자신의 과자 귀를 뜯어먹는 변태(?) 여자친구와 그거라도 먹고 몸이 약한 여자친구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심성 착한 아랍계 유학생이 등장한다.
 
능청스럽게 현실에서 비현실로 슬쩍 옮겨갔다면, 이제 따뜻함이 캐시미어 목도리처럼 독자들을 감싼다. 비현실적이면 어때. 이렇게 따뜻한걸. 이렇게 푸근하게 안아주는걸. 정세랑표 따뜻함의 첨병은 달콤함이다.
 
소설가 정세랑. 따듯함을 내장한 장르적 상상력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사진 목정욱]

소설가 정세랑. 따듯함을 내장한 장르적 상상력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사진 목정욱]

“울면서 만든 베리타르트의 맛을 두고 컴플레인이 걸려오진 않았어.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효진’)
 
그러나 달콤함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설탕조차도 내가 점프를 생각하는 걸 멈추게 할 수는 없었어. 달고 신 것으로 녹일 수 없는 나쁜 생각들이 있잖아.”(‘옥상에서 만나요’)
 
그럴 땐 더욱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 물론 『규중조녀비서(閨中操女秘書』) 같은 비현실적 처방이다. “전근대 여성들의 고민을 모아둔” 것 같은 이 주문서로 소환된 ‘괴물 남편’으로 주인공은 많은 사람들을 절망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바로 이 부분이 정세랑 소설의 정점이자 지향점이다.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 정세랑은 “선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평범한 것 같은데, 아니 평범하기 때문에 절망의 끈을 끊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줌으로써 비슷한 절망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구멍이 나지 않도록 단계별로 식혀줘야 하는 ‘타르트 반죽의 휴지기’처럼 말이다.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 (‘효진’)
 
이훈범 대기자/중앙콘텐트랩 lee.hoonbe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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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