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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쇼팽을 만든 농민출신 아버지의 피·땀·눈물

기자
송동섭 사진 송동섭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
우리에게 친숙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지중해의 한 섬에서 비가 오는 날, 몸이 약한 쇼팽은 외출한 그 누구를 기다리며 작곡을 합니다. 그 누구는 바로 조르주 상드. 작가이며 파리 사교계의 여왕이었죠. 쇼팽의 삶 그리고 상드와의 만남과 오랜 동행의 의미를 동시대의 다채로운 사회 모습과 함께 조망해봅니다. <편집자>
 
쇼팽의 부모 (왼쪽부터)유스티나와 미코와이. 지금은 유실된 암브로지 미에로셰프스키(Ambrozy Mieroszewski)가 남긴 스케치의 사진을 바탕으로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가 그린 그림. 폴란드 국립쇼팽연구소 소장. [사진 송동섭]

쇼팽의 부모 (왼쪽부터)유스티나와 미코와이. 지금은 유실된 암브로지 미에로셰프스키(Ambrozy Mieroszewski)가 남긴 스케치의 사진을 바탕으로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가 그린 그림. 폴란드 국립쇼팽연구소 소장. [사진 송동섭]

 
프레데릭 쇼팽의 할아버지, 프랑수아는 프랑스 북동부 로렌느지방의 마랭빌에서 마차 바퀴 제작자였는데 주민들의 존경을 받아 마을 동장 역할도 하고 있었다. 당시 그 지역에는 폴란드 귀족 미샤우 얀 파크 백작의 城(성)과 영지가 있었는데, 파크 백작은 주변 강대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폴란드 역사상 첫 봉기에 가담했다가 그 봉기가 실패한 후 그곳으로 넘어와 있었다.
 
파크 백작의 영지 관리인인 베이들리치는 프랑수아를 신임하여 그를 가까이 두었다. 이런 인연으로 프랑수아의 아들 니콜라도 어렸을 때부터 베이들리치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그에게서 기초적인 폴란드어를 배웠고, 그의 파리 출신 아내로부터는 프랑스 문학과 독일 문학, 그리고 음악과 회계학을 배웠다. 나아가 그는, 누구의 도움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나 교육자를 양성하는 학교에서 중등교육도 받았는데 미천한 농부의 아들치고는 좋은 교육을 받은 셈이었다.
 
1787년 파크 백작이 죽자 베이들리치는 폴란드로 돌아가는데 16살이 된 니콜라에게 동행을 권유하였고 시골 마을 출신의 니콜라는 나름 번화한 바르샤바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니콜라는 베이들리치가 관리인으로 있던 담배공장에서 회계원으로 일하면서 때로 그의 아이들의 가정교사 역할도 하였다.
 
그는 1792년 공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일을 하였는데 당시 그가 프랑스에 있던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는 프랑스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스러웠고 돌아가면 군대에 징집될 수 있어서 귀국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폴란드에서 앞길이 막혔을 때 몇 차례 귀국을 결심하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때마다 심한 병을 앓아 귀국을 실행할 수 없었다.
 
담배공장은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던 혼란기에 문을 닫았고 실직한 니콜라는 병까지 얻어 폴란드에 눌러앉았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니콜라라는 이름도 폴란드식인 미코와이로 바꾸었다.
 
강국의 분할 점령에 대한 폴란드의 반발로 코스치우스코가 이끄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폴란드 방위군에 들어가서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약소국 폴란드가 열강에 맞서는 이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미코와이는 장교로 바르샤바의 요충지 프라가를 방위하는 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1794년 11월 4일 미코와이의 중대가 임무 교대를 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가는 러시아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미코와이 쇼팽. 쇼팽의 아버지. 지금은 유실된 암브로지 미에로셰프스키(Ambrozy Mieroszewski)의 1829년 스케치를 토대로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가 그린 유화. 국립 쇼팽연구소 Narodowy Instytut Fryderyka Chopina 소장. [사진 송동섭]

미코와이 쇼팽. 쇼팽의 아버지. 지금은 유실된 암브로지 미에로셰프스키(Ambrozy Mieroszewski)의 1829년 스케치를 토대로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가 그린 유화. 국립 쇼팽연구소 Narodowy Instytut Fryderyka Chopina 소장. [사진 송동섭]

 
한나절의 백병전 끝에 프라가는 함락되었다. 러시아군은 전쟁 중 희생된 러시아군에 대한 보복으로 점령지에 있던 폴란드 군관민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약 2만명이 학살되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그것을 피했다. 적의 공격이 몇 시간만 빨랐어도 미코와이의 운명은 달랐을 것이었다.
 
그는 전쟁에서 다쳤고 전쟁 후의 혼란기였기에 경제 상황은 엉망이었다. 암담했던 그는 그러나, 귀족 가문의 윙친스카 부인은 그를 가정교사로 채용하였다. 우연히 프랑스 출신의 그를 만난 부인이 그의 태도와 실력에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시골 농부 출신의 맨손의 이주민으로서 귀족 집안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상류사회의 가정에서 교양어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당시 사정도 도움이 되었다.
 
웡친스카 가정의 아이들이 자라 가정 교사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미코와이는 스카르벡 백작 가정으로 옮겨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다. 스카르벡 백작부인은 윙친스카 부인과 왕래가 잦았는데 윙친스카 부인을 방문할 때 미코와이가 눈에 띄어 관심을 가졌었다.
 
바르샤바 인근의 젤라조바 볼라 마을의 스카르벡 백작 가정에서 가정교사로 있을 때 미코와이는 백작의 먼 친척인 유스티나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서 미래에 유명한 음악가 프레데릭 쇼팽이 태어난 것은 1810년 3월 1일이었다. 스카르벡 백작가정에서도 가정교사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그를 높이 평가한 백작가(家)는 그들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중등학교인 바르샤바 리세움에 소개하여주었다.
 
리세움은 바르샤바 대학이 설립되기 전 폴란드에서 가장 주요한 교육기관이었고 그곳의 교수는 공무원 대우를 받는 영예로운 자리였다. 그의 폴란드 적응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실용적이면서 자신에게 엄격하였던 그는 바른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평판은 좋았고 리세움에서 가르치던 동료 교사들 –대부분이 당시 폴란드의 중추적 지식인이었다– 과 돈독한 친교를 맺으며 교류의 폭을 넓혔다.
 
그는 처음에는 보조교사로, 4년 후부터는 정식 교수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리세움에 20년 넘게 재직하였는데, 태어날 때의 그의 신분과 비교하면 그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상승한 것이었다. 교수 아버지를 둔덕에 주로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이 다니던 그 학교에 아들 프레데릭도 들어갈 수 있었다.
 
미코와이의 가족은 지방 출신의 학생들에게 숙식도 제공하였고 그의 아들은 자연스럽게 귀족 자제들과 한 식구처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방학 때면 귀가하는 친구를 따라 그들이 살던 지방으로 가서 그들의 가족들과도 어울렸다.
 
유스티나. 쇼팽의 어머니. 지금은 유실된 암브로지 미에로셰프스키(Ambrozy Mieroszewski)의 1829년 스케치를 토대로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가 그린 유화. 극립 쇼팽연구소 Narodowy Instytut Fryderyka Chopina 소장. [사진 송동섭]

유스티나. 쇼팽의 어머니. 지금은 유실된 암브로지 미에로셰프스키(Ambrozy Mieroszewski)의 1829년 스케치를 토대로 얀 자모이스키(Jan Zamoyski)가 그린 유화. 극립 쇼팽연구소 Narodowy Instytut Fryderyka Chopina 소장. [사진 송동섭]

 
프레데릭 쇼팽이 일찍부터 폴란드의 귀족사회와 지식인계층에 알려지고 인정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음악이 폴란드인의 정서와 민속적 요소를 담아낸 것도 도움이 되었다. 폴란드인들은 그에게 쉽게 동질감을 느꼈고 그는 그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후에 폴란드인들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음악가 프레데릭 쇼팽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프랑스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 아들을 폴란드의 중심에 자리매김시킨 미코와이의 행보를 보면 수많은 상황적 운이 그를 이끌어 준 것처럼 보인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새로운 길이 열리고 또 열렸고 그 새로운 길은 더 높고 더 나은 곳으로 그와 그의 가족을 이끌었다. 실제로 운이 그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과 계속된 노력이다.
 
미코와이를 아는 사람들이 전하는 그에 대한 평가는 “예의 바르고 학식이 있었고, 검소하고 매우 질서정연하며, 부드러웠지만 엄격했다”는 것이었다. 리세움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그는 ‘교육평가위원회’에 소속되어 공립학교에서 근무할 프랑스어 교사를 평가하거나 교육에 사용될 프랑스어 작품을 심사하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내일이 오늘 노력한 결과라고 믿는 사람이면 그가 교수로 재직할 때 능력과 성실함을 보였을 것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프레데릭의 아버지 미코와이는 빈손으로 이국땅에 이주했고 우여곡절 끝에 오직 자신의 실력과 노력에만 의존하여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폴란드에서 동화하려 노력했던 미코와이 쇼팽의 행보를 자신의 뿌리, 프랑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나간 것이다.
 
당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아직 모호하던 시기였고, 특히 프랑스 북동부의 로레인 지방은 미코와이가 태어나기 얼마 전까지 폴란드 출신의 왕 스타니스와프 레스친스키(Stanisław Leszczyński)가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그 지방은 그 후로도 통치권이 유동적이었다가 2차대전 이후에야 프랑스로 확정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흔히 운칠기삼이라고 하며 성공의 요인으로 運(운)의 중요성을 얘기하는데 7할의 운을 활용하고 그것을 발판 삼아 성공을 이루는 열쇠는 3할의 技(기)일 수도 있다. 프레데릭 쇼팽은 능력 있고 성실한 아버지 덕에 이주민의 아들임에도 폴란드 사회의 중심에 일찍부터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자신의 재능도 더 빨리 인정받을 수 있었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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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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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