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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면 다 된다 생각하나” 성범죄전담 판사 호통 친 까닭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강제추행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된 이모(55)씨는 합의가 급했다. 어떻게든 피해자에게 연락하려고 했다. 반성문도 냈다. 피해자는 자꾸 피고인으로부터 전화가 오는 게 괴로웠다. 전화가 오지 않게 해달라며 법원에 요청해야 했다. 서울고법 형사9부 재판장은 지난 7월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안 좋은 행동을 하고 이걸 덮으려고 또 다른 법 외적인 수단을 동원하느냐"며 피고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법정은 일순 고요해졌다. 재판장은 "무조건 합의하면 다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피해자에게 '합의 안 해주면 보복하겠다'고 메시지 보내고, 혐의 부인해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안 좋은 기억 떠올리며 증언하게 했다. 이젠 법정구속 되니까 이젠 태도 바꿔 합의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고 계신다"라고 질타했다.
 
피해자를 직접 접촉해선 안 되고, 피해자 변호사를 통해야 하는데 이를 어기고서라도 합의에만 매달리는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부적절한 합의 시도는 여전히 반복된다. 이 재판부는 지난 6일 조모(42)씨의 친족 강간 혐의에 대한 재판에서 피해자 변호사와 피고인 변호사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피해자 변호사는 "피해 아동 어머니는 합의 의사가 없다고 하신다"고 말했지만, 피고인 변호사는 "제가 죄송하지만, 어머니를 몇 번 만났는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놀라 "변호인이, 피해자 어머니를 직접 만났다고요?"를 물었다. 이어 피고인 변호사에게 "성범죄 사건에서 합의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피해자 변호사를 통해서만 확인하셔야 하고 피해자나 피해자 부모와도 직접 접촉하거나 연락하면 안 된다"는 걸 큰 소리로 설명해줘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게 결코 형량에 유리한 게 아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합의 과정 2차 피해 여전…"확실한 처벌규정 있어야" 
서울고등법원 청사 전경. [사진 서울고법 홈페이지]

서울고등법원 청사 전경. [사진 서울고법 홈페이지]

 
성범죄 관련해서 이름난 몇몇 법률사무소에선 피해자에게 직접 연락을 시도하기도 한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열심히 하는 곳에선 사무소 직원들이 가해자의 형이나 삼촌 행세를 하면서 피해자에게 읍소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성범죄 양형기준에는 '합의 시도 중 피해 야기'는 가중요소가 된다고 쓰여 있지만, 피해자 쪽과 직접 연락하는 일은 반복되고 있다.
 
법률구조공단 피해자 국선전담변호사 신진희 변호사는 "'그냥 연락을 했다' 정도로 2차 피해로 인정이 되진 않고, 업무 방해가 있다거나 하는 정도의 피해가 있어야 하고 사실확인서를 내거나 고소를 해 증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 증명은 어려운데, 일단 합의하면 과정은 묻히기 마련이니 무리한 합의 시도는 계속된다. 앞선 사례처럼 재판부가 잘 살펴봐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판사들이 합의를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결과만을 본다"는 것이 현직 고등법원 판사가 말한 현실이다.
 
형사정책연구원 장다혜 부연구위원은 "미국 몇몇 주와 스코틀랜드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만나는 것을 '사법방해' 행위로 엄중하게 처벌한다"며 "가해자가 증인을 만나면 증언을 오염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만약 그런 만남이 이뤄졌을 경우 재판을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동서대 경찰행정학과 이현정 교수는 '성폭력범죄의 친고죄 폐지에 따른 피해자 보호 방안' 연구에서 "아동·청소년 성범죄 피해자를 상대로 합의를 강요하면 형사처벌을 받지만 성인 피해자에 대한 합의 강요는 처벌할 수 없다. 피해자가 합의 거절 의사를 분명히 했음에도 계속적인 합의를 요구하는 경우 처벌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의 내용, 돈 말고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어야…배상명령제도 활용도 
대법원 정의의 여신상.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의의 여신상. 서울 서초동.

 
합의 내용에 돈뿐 아니라 피해자가 자신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포함하는 방법도 제시된다. 장 부연구위원은 "돈 중심의 합의 관행은 피해자가 애초에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원했던 정의의 경험을 오직 돈을 받는 것으로 한정시켜 버린다"고 말한다. 그는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두렵다'면서 '가해자가 다시는 그런 일을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서 이를 "정의감 회복에 대한 요구"라고 말했다. 
 
합의서엔 ^가해자의 접근금지 ^가해자가 향후 공동체에서 해야 할 역할 ^가해자의 성인지 프로그램 참여 ^가해자가 앞으로 성범죄를 자신이나 타인에게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방안 등도 포함할 수 있다.
 
합의 내용을 제대로 이행하는지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인 김상준 변호사는 지난 7월 양형연구회 심포지엄에서 "피해자와의 합의 후 양형에서 유리한 취급을 받은 가해자가 후일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며 처벌을 다시 해 달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례도 있다"고 소개했다. 독일에서는 피해자의 피해회복을 조건으로 형의 집행을 유예해줬는데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집행유예를 취소하기도 한다.
 
피해자를 '처벌이냐, 합의냐' 중 택일하게 하는 상황에 몰아넣지 않기 위해선 '형사공탁제도'나 '배상명령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공탁은 피해자가 돈을 받기 원치 않는 경우 법원에 돈을 맡겨두는 것이다. 다만 피해자가 주민등록초본 등 자신의 정보를 공개하는 데 동의해야만 피고인이 공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론 잘 쓰이지 않고 있다. 법률구조공단 변주은 변호사는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가 아닌 사건접수확인원이나 사건번호 등을 통해 본인을 확인하고 공탁금을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배상명령은 형사재판 중에 민사배상금을 확정해주는 제도다. 한 성범죄피해자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다들 배상명령신청을 하고 싶어하는데, 판사들은 항상 각하한다"고 말한다. 그는 "형사 재판하는 판사들이 민사사건처럼 금액을 정하려니 피곤하고, 책임지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형사정책연구원이 낸 '성폭력범죄의 친고죄 폐지에 따른 피해자 보호 및 지원 내실화 방안'에 따르면 배상명령은 사기 등 피해 액수가 뚜렷한 소수 사례에서만 이뤄지긴 하지만, 성폭력범죄에서는 배상액을 산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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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