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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디자이너 된 인문학도…"직접 보고 들으며 관심사 찾길"

일본 스타트업 '풀러'의 디자이너 김영빈씨.

일본 스타트업 '풀러'의 디자이너 김영빈씨.

‘디자인이란 외형적인 것보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일본 스타트업 '풀러(fuller)'의 디자이너 김영빈(34)씨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정의입니다. 스무 살이었던 때만 해도 그는 조선대 일본학과에 입학해 일본어 교사를 꿈꿨는데요. 학점이 좋았던 영빈씨는 현지 경험과 회화 실력만 갖추면 일본어 교사로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커리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2009년 3월 떠난 일본 어학연수에서 그는 진로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됩니다. 도쿄 어학원에서의 첫날. 그곳에는 엔지니어부터 디자이너, 헤어디자이너, 경영학도까지 수업을 들으러 왔죠. 따로 전공 분야가 있는 동료들의 일본어 실력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 받은 충격이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어요. 저보다 일어를 더 잘하는 그들이 대체 어떤 생각으로 공부하는지 궁금했죠. 그날부터 매일 어학원 사람들과 상담을 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 노력했습니다. 아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속에 있는 진짜 나를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도 당시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디자이너가 유독 많았습니다. 전문가로서 자기 직업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들이 부러웠죠. 어느 순간부터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동경하게 됐지만 인문학도가 미술로 전공을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었어요.
 
“(한국의 홍익대 같은) 타마미술대학 대학원을 다니던 누나가 있었어요. 한국에선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미술대학원을 가게 됐는지 궁금했죠. 공부를 마치고 귀국 비행기를 타려는 그를 붙잡고 30분 동안 이야기했어요. 그때 그 누나가 디자인경영이라는 분야가 뜨고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고 알려줬습니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가슴이 떨렸습니다. 아마 그때가 제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인 것 같아요.”
 
미술대학 복수전공 한 인문대생

마침 모교인 조선대 미대에 디자인 매니지먼트 전공이 있었습니다. 1년으로 계획했던 어학연수를 9개월 만에 접고 이듬해 1월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인문대생이 미술을 복수전공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실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해야 하는 과정 또한 만만찮았죠. 그때까지 영빈씨는 스케치를 해본 적도 없었고 포토샵도 할 줄 몰랐거든요. 게다가 미대 담당교수는 대놓고 엄포를 놓았어요. ‘학점도 좋은데 왜 미대를 오려 하느냐, 오더라도 바로 포기하고 말 것이다, 포기하지 않더라도 내가 F학점을 줄 것’이라며 매섭게 경고했습니다. 미대에서는 영빈씨의 복수전공 허가 여부를 놓고 전체 교수회의를 열 정도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고 해요. 결과는 합격. 인문대생이 미술을 복수전공 하는 조선대 최초 사례가 된 거죠. 
 
2010년 ‘레드닷 어워드’ 디자인 콘셉트 부문 수상작인 ‘리자드 백’. 손잡이가 끊어지면 윗부분을 뜯어내 다시 쓸 수 있는 쇼핑백이다.

2010년 ‘레드닷 어워드’ 디자인 콘셉트 부문 수상작인 ‘리자드 백’. 손잡이가 끊어지면 윗부분을 뜯어내 다시 쓸 수 있는 쇼핑백이다.

디자인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기회는 찾아왔습니다. 동아리 활동 중 재활용을 주제로 제안한 아이디어가 2010년 '레드닷(Red dot)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받게 됐죠. 독일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는 iF 디자인 어워드, IDEA 디자인 어워드와 함께 세계 3대 디자인상으로 꼽힙니다.
 
“우연히 어머니가 손잡이가 떨어진 쇼핑백을 버리는 모습을 본 후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갑티슈를 처음 쓸 때 뜯어내는 종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갑티슈처럼 쇼핑백도 끊어진 손잡이를 제거하고 윗부분을 뜯어내어 손잡이처럼 만들면 다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꼬리를 잘라도 다시 자라는 도마뱀에 착안해 ‘리자드백(lizard bag)’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영빈씨의 리자드백은 ‘리 디자인(re-design)’, ‘씽크 디자인(ThinkDesign)’이라는 호평을 받았어요. 이를 계기로 삼성 글로벌 디자인 멤버십, LG Japan의 글로벌 디자인 리포터로 참여할 수 있었고요. 졸업을 앞둔 영빈씨는 일본에서 대학원에 진학해 디자인 매니지먼트 분야를 깊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일본 대학 중 유일하게 공과대학 내에 디자인매니지먼트 연구실이 있는 지바대학교에 가고 싶었죠. 지바대 와타나베 교수와 친분이 있는 조선대 이진렬 교수와 지바대 객원교수인 전북대 홍정표 교수가 그를 돕기 위해 나섰어요. 몇 차례 거절을 당했지만 두 교수의 도움으로 영빈씨는 와타나베 교수와 독대할 기회를 얻었고, 2011년 4월 지바대 공대 디자인매니지먼트 연구실의 연구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레드닷어워드 수상 후 일본 지바대 연구생으로
간신히 연구생이 되긴 했지만 석사과정에 들어가려면 공학과 디자인과목 필기시험을 일본어 또는 영어로 치러야 했어요.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외국어로 전공과목을 공부하는 일은 버거운 과정이었고, 결국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죠.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그는 다른 작전을 세웠습니다. 다음날 와타나베 교수의 활동패턴을 분석하기 위해 오전 7시까지 교수 연구실로 출근했어요.
 
“교수님이 오전 7시 40분쯤 오셔서는 연구실을 한 번 쓰윽 둘러보시더군요. 그날부터 무조건 7시 30분까지 교수연구실에 와서 공부했습니다. 몇 달 동안 그랬더니 어느 날 교수님이 추천 입학서류가 든 봉투를 주셨어요. 대학원 합격 발표 2주 남겨둔 시점이었죠.”
 
2012년부터 지바대 공과대학 대학원에서 서비스·프로덕트 디자인 전공 석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인문학도 출신 디자이너라는 특별한 시선으로 서비스나 제품 디자인에 담긴 인사이트(insight·통찰)를 보려고 노력했어요.
 
지난해 모바일마케팅·애드테크 컨퍼런스인 ‘맥스 서밋 (MAX Summit 2017)’에서 풀러의 ‘앱에이프’ 서비스에 대해 관람객에게 설명하고 있는 김영빈씨. 앱에이프는 사용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모바일 시장의 흐름을 알려주는 서비스다.

지난해 모바일마케팅·애드테크 컨퍼런스인 ‘맥스 서밋 (MAX Summit 2017)’에서 풀러의 ‘앱에이프’ 서비스에 대해 관람객에게 설명하고 있는 김영빈씨. 앱에이프는 사용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모바일 시장의 흐름을 알려주는 서비스다.

대학원 1년차에는 또 다시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 찾아왔죠. 영빈씨는 삼성이나 LG 같은 국내 대기업 입사를 고려했지만, 그와 협업했던 LG전자 재팬 담당 부장은 일본에서 경력을 계속 쌓아갈 것을 권했어요. 영빈씨는 일본 IT기업 ‘사이버에이전트’ 입사를 목표로 정했습니다. 사이버에이전트는 일본의 IT기업 중 '톱(Top) 3' 안에 드는 기업으로 우리나라의 NHN 같은 회사였어요. 이곳에 취업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각오로 영빈씨는 오로지 그 회사에만 입사지원서를 제출했어요. 세 차례의 면접을 거친 끝에 2013년 1월 사이버에이전트 입사가 확정됐죠. 남은 1년간 논문을 끝낸 후 입사하는 조건으로 내정됐어요.
 
2014년 1월, 사이버에이전트 디자인 코스로 입사한 영빈씨는 3개월간 디자인연수 과정에서 UX(User Experience·사용자경험), UI(User Interface· 디지털 기기를 작동시키는 명령어나 기법을 포함하는 사용자 환경) 디자인 등 웹디자인 전반을 배웠습니다. 핵심 부서인 광고사업본부에 배치돼 업계 화두인 디지털 마케팅을 두루 경험할 수 있었어요. 나이키·트위터·캐논·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도 상대할 수 있었죠.
 
하지만 부서 내 유일한 디자이너이자 막내로서 자신의 제안을 실현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슬럼프에 빠진 그에게 지바대 연구생 동기였던 일본인 친구가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대학생들에게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받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이었죠. 영빈씨의 강연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는 그 친구는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어요. 스타트업으로의 이직은 연봉 등 기타 조건이 더 나빠질 수도 있는 모험이었지만, 고민에 빠져있던 영빈씨에게는 생각해 볼 만한 제안이었어요.
 
“그 회사 대표(CEO)와 만난 후 확신이 생겼어요. 풀러(fuller)라는 회사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또 회사 분위기는 어떤지를 느낄 수 있었거든요. 언젠가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저에게 대표는 내 꿈을 풀러에서 펼쳐보라고 제안하더군요.”
 
영빈씨는 2015년 8월 스타트업 풀러의 17번째 멤버로 입사했습니다. 풀러는 ‘앱에이프(App Ape)’라는 사용자 데이터 기반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모바일 시장 동향을 분석 후 다양한 기업에 제공하는 모바일 앱 분석 서비스를 만듭니다. 영빈씨는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프로덕트 매니저(Product Manager)를 맡게 됐고, 이후 4년간 디자이너를 겸직하고 있어요. 지금은 직원은 50여 명으로 늘었고 외국인 비율도 15%에 이르죠. 여러 직군에 글로벌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어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에요.영빈씨는 진로를 고민하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조언했습니다.
 
“저 또한 10대 시절 꿈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막연하게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꿈을 억지로 만들려 하지 말고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며 관심이 가는 분야나 하고 싶은 것을 찾아보길 바랍니다.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는 외국어 공부를 미리 해두면 나중에 어떤 일을 하든 상당히 유리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관련 정보나 서적을 더 잘 찾아볼 수 있고 업계의 유명 인사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외국어를 잘하면 해외에 나가서 일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글=김은혜 꿈트리 에디터
 
※’자기주도진로’ 인터뷰는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행하는 자유학기제 웹진 ‘꿈트리(dreamtree.or.kr)’의 주요 콘텐트 중 하나입니다. 무엇이 되겠다(what to be)는 결과 지향적인 진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겠다(how to live)는 과정 중심의 진로 개척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틀에 박힌 진로가 아닌,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진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재의 성공 여부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고, 남들이 뭐라 하든 스스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길’을 점검해 보시기 희망합니다. 꿈트리 ‘자기주도진로’ 인터뷰는 소년중앙과 협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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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