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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세오 보내줘 고맙다” 하노이 덮은 금성홍기·태극기

스즈키컵 결승전 승리 후 한 베트남 선수가 태극기를 몸에 두른 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하노이 거리에도 많은 태극기가 펄럭였다. [SBS스포츠 영상 캡처]

스즈키컵 결승전 승리 후 한 베트남 선수가 태극기를 몸에 두른 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하노이 거리에도 많은 태극기가 펄럭였다. [SBS스포츠 영상 캡처]

 
관중석 앞자리에 앉은 젊은 부부도, 티켓 없이 몰래 들어와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던 노인도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모두 눈물을 펑펑 흘렸다. 최근 국내에서 인기몰이 중인 영국 밴드 ‘퀸(Queen)’의 노래 ‘위 아 더 챔피언스(We are the champions)’가 울려퍼졌지만, 이내 관중들의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에 묻혔다. 옆자리에서 태극기와 금성홍기를 함께 흔들며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베트남 남성 축구팬은 “박항세오(박항서의 베트남식 발음)를 보내줘 너무 고맙다”며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해외에서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뿌듯했던 적이 또 있을까.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직후 베트남 축구팬들이 하노이 시내로 몰려나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하노이=송지훈 기자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직후 베트남 축구팬들이 하노이 시내로 몰려나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 하노이=송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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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미딩 국립경기장은 거대한 용광로 같았다. 박항서(59) 감독을 비롯해 베트남 축구대표팀 선수들과 관계자, 4만여 관중이 함께 뿜어내는 열기와 함성이 그라운드 안팎을 가득 채웠다. 2008년 이후 10년 만의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우승. 결승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1-0으로 꺾은 베트남이 축구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순간이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이나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등 메이저급 대회에서 우승을 기대하기 힘든 베트남 축구팬들에게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스즈키컵은 인기나 주목도 면에서 두 대회를 능가하는 이벤트다. 최근 동남아시아 축구 맹주 자리를 놓고 태국과 라이벌 관계가 만들어지면서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베트남이 지난해 10월 2002 한·일 월드컵 4강 주역 박항서 감독을 영입한 건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 축구의 투혼과 선수 육성 시스템을 배우기 위한 결정이었다.
 
스즈키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기뻐하는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EPA=연합뉴스]

스즈키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기뻐하는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EPA=연합뉴스]

 
우승컵의 주인을 가른 승부는 단 한 골에 갈렸다. 전반 6분 만에 베트남 공격수 응우옌아인득이 팀 동료 응우옌꽝하이의 크로스를 논스톱 왼발 슈팅으로 연결해 말레이시아 골망을 흔들었다. 이후 말레이시아가 만회 골을 위해 반격했지만 베트남은 침착한 수비로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다. 지난 11일 원정 1차전 2-2 무승부를 포함해 1, 2차전 합계 3-2로 베트남이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15일 열린 스즈키컵 시상식에서 박항서 감독에게 우승 메달을 걸어주고 있는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 [VNA=연합뉴스]

15일 열린 스즈키컵 시상식에서 박항서 감독에게 우승 메달을 걸어주고 있는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 [VNA=연합뉴스]

 
값진 기록이 함께했다. 스즈키컵 도전사를 통틀어 첫 무패 우승. 그리고 A매치 16경기 연속 무패(9승7무). 스페인과 브라질이 보유한 통산 A매치 최다 무패(35경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재 무패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나라 중에서는 최다 기록이다. 베트남 축구 역사를 통틀어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다.
 
베트남 대표팀이 스즈키컵에서 우승한 직후 하노이 시내는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미딩 국립경기장 주변은 사람과 오토바이, 자동차가 뒤엉켜 ‘통제 불가’ 상태가 됐다. 금성홍기와 태극기가 이리저리 나부끼고,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도로를 통제해야 할 공안과 군인들도 이날만큼은 ‘피 끓는 청춘’으로 돌아갔다. 붉은 옷을 입은 팬들과 어울려 “베트남 코 렌(co len·파이팅)! 박항세오 코 렌!”을 목청껏 외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택시 잡기를 포기하고 우승 축하 인파에 휩쓸려 숙소 호텔로 향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다가와 “박항서의 나라에서 왔냐”며 악수와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직후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하노이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15일 열린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을 응원하는 베트남 팬. [EPA=연합뉴스]

15일 열린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박항서 감독을 응원하는 베트남 팬. [EPA=연합뉴스]

 
전반 초반 선제골로 우승 문턱에 한발 더 다가섰지만 박 감독은 좀처럼 자리에 앉지 못했다. 벤치 옆으로 살짝 물러나 연신 물을 들이켜며 초조해했다. 아찔한 실점 위기 상황에서는 벤치 기둥 뒤로 얼굴을 감추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말레이시아의 거친 플레이에 격앙된 선수들에게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제스처를 연신 취했지만, 정작 가장 흥분한 인물은 박 감독 자신이었다. 경기 내내 살짝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던 그의 얼굴은 종료 휘슬이 울리고서야 활짝 펴졌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16일 쩐바즈엉 타코 그룹 회장에게 우승 축하금 10만 달러를 전달받고 있다. 박 감독은 이날 받은 상금을 베트남 축구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곧바로 기탁했다. [사진 베트남 타임스]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이 16일 쩐바즈엉 타코 그룹 회장에게 우승 축하금 10만 달러를 전달받고 있다. 박 감독은 이날 받은 상금을 베트남 축구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곧바로 기탁했다. [사진 베트남 타임스]

 
경기 후 박 감독은 “우승 트로피는 베트남 국민에게 드리고 싶다. 축구 지도자라는 작은 역할로 대한민국과 베트남 우호 증진에 이바지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베트남 국민께서 감독인 내게 보내준 사랑만큼 내 조국 대한민국도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감독이 베트남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이후 단순히 ‘한국 출신 지도자’가 아닌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수 발마사지 직접 하고 매일 밤 늦도록 전술 회의…‘박항서 매직’은 땀의 결실
박항서 감독의 지도력을 ‘파파 리더십’으로 표현한다. 다친 선수를 위해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양보하고, 재활 트레이너의 일손이 바쁠 때 직접 나서서 선수들 발 마사지를 해준 이야기가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경기에서 패한 직후 “너희들은 최선을 다했다. 고개 숙이지 말라”는 박 감독의 격려에 감동해 눈물을 흘린 베트남 선수들의 사연도 유명하다.
 
엄밀히 말해 파파 리더십은 ‘박항서 매직’의 일부분이다. 마법 같은 지도력의 출발점은 ‘밤을 잊은 열정’에 있었다. 박 감독은 스즈키컵을 치르는 동안 거의 매일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승 2차전을 앞두고도 밤늦게까지 코칭스태프 회의를 진행한 뒤 숙소에서 선수들의 컨디션을 정리한 자료를 보고 또 봤다. 선수들의 데이터에서 혹시나 간과한 부분이 없는지, 라인업과 전술 결정에 오류가 없는지 거듭 살폈다.  
 
남다른 노력은 신들린 듯한 용병술로 열매를 맺었다. 지난 1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결승 1차전에서 전격 선발 기용한 벤치 멤버 응우옌후이훙이 선제골을 터뜨리며 원정 2-2 무승부에 기여했다. 홈 2차전에서는 1차전에 결장한 응우옌아인득이 결승골(1-0)의 주인공이 됐다.
 
변수까지 꼼꼼히 챙기는 집중력과 선수들을 보듬는 너그러움을 합쳐 만든 ‘박항서식 리더십’은 ‘감독 데뷔 이후 첫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맺었다. 늘 우승 문턱까지 오르고도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하던 징크스도 시원하게 떨쳐냈다.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 올해 치른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축구선수권대회와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각각 준우승과 4강으로 마무리한 바 있다.
 
하노이=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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