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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달 착륙의 충격, 캔버스에 흐르는 무한우주

한묵 작가는 평생 지독하게 창작에만 매진했다.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생명력의 실체를 탐구한 그는 후기에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다. 작가의 대표작 ‘상봉’( 1991, 200x300㎠).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한묵 작가는 평생 지독하게 창작에만 매진했다.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생명력의 실체를 탐구한 그는 후기에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다. 작가의 대표작 ‘상봉’( 1991, 200x300㎠).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1969년 7월 20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쏘아 올린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당시 TV로 역사적인 이 장면을 지켜보고 큰 충격을 받아 3년간 붓을 들지 못한 화가가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작업하던 한인 화가 한묵(1914~2016)이다.
 
한국에서 홍익대 미대 교수였던 그는 61년 마흔 일곱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가 그림에만 매달려 지내던 터였다. 후에 그는 이때 받은 충격을 이렇게 밝혔다. "인공위성에서 (지구 위)우리 생활을 감시할 정도로 과학이 발전했는데, 과거의 공간 개념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과학적인 공간을 탐구해 화폭에 담고 싶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11일 개막한 한묵 작가의 유고전 ‘한묵: 또 하나의 시(詩) 질서를 위하여’는 신선한 충격과 감동, 그 자체다. 관람객들은 작품이 전하는 치열한 작가 정신에 놀라고, 여태 이 작가의 존재를 잘 몰랐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란다.
 
개막일 전시장을 찾은 작가의 부인 이충석(86)씨는 "우리 선생님 작품 앞에서는 언제나 옷깃을 여미게 된다”며 "선생님은 평생 에트랑제(Etranger, ‘이방인’이란 뜻)로 살았다. 저는 지금도 작품을 보면 선생님을 만난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한묵 작가는 평생 지독하게 창작에만 매진했다.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생명력의 실체를 탐구한 그는 후기에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다. 작가의 대표작 ‘황색운의 운무’( 1995, 202x204㎠).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한묵 작가는 평생 지독하게 창작에만 매진했다. 작품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와 생명력의 실체를 탐구한 그는 후기에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다. 작가의 대표작 ‘황색운의 운무’( 1995, 202x204㎠).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서울에서 태어난 한묵(본명 한백유·韓百由)은 중국 다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55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있다가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61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오로지 그림만 그렸던 생활에 비해 전시는 손에 꼽을 정도로만 했고, 80대까지 비좁은 아파트에 살며 1시간 거리에 떨어진 작업실로 출퇴근해 그림을 그렸다. 부인 이씨는 "선생님은 새로운 변모 없이는 전시를 열지 않았다. 우리는 겨우 생계를 유지하며 평생 고학생처럼 살았다”고 했다. "예술가가 부유해지면 맑은 정신을 잃게 된다”는 그의 투철한 신념 때문이었다.
 
이번 전시는 ‘기하 추상의 거장’ 한묵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자리다.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 60여 점을 포함해 13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은 "시대를 앞선 한묵 작가의 감각은 지금 젊은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이번 유고전이 소통의 문을 여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50년대 구상 회화부터 90년대 말까지의 작업을 시기별로 5부로 나누어 작품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쟁 이후 ‘가족 이산’ ‘가난’의 경험을 담았던 그의 작품은 57년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한 이후 추상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파리에 도착한 61년부터는 대상을 오로지 면과 색, 선으로만 표현하는 순수추상에 매달렸다.
 
판화공방 ‘아틀리에17’에서 작업 중인 한묵(1974). 이 시기에 그의 독특한 공간 표현방식이 탄생했다.

판화공방 ‘아틀리에17’에서 작업 중인 한묵(1974). 이 시기에 그의 독특한 공간 표현방식이 탄생했다.

◆ 4차원의 시공간을 탐구했다=그러다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보고 "우주라는 무한 공간을 열어젖힌 과학의 힘에 충격을 받은” 그는 3년간 붓을 놓았다. 대신 판화공방에서 동판화 작업에 매달렸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신성란 큐레이터는 "이 시기의 판화에 동심원과 방사선 등이 등장했다”며 "캠퍼스와 자를 사용하며 엄격하게 계산된 구성으로 시간의 연속 개념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 세계에 ‘역동적인 공간’이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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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 작업으로 독창적인 공간 표현 방식을 체득한 작가는 이를 캔버스로 옮기기 시작했다. 75년작 ‘푸른 나선’과 89년작 ‘십자성의 교향’ 등은 모두 "역동적이면서도 우주로 열린 무한공간”을 표현한 대표 작품이다. 이 중에서도 신 큐레이터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면서 작업한 91년작 ‘상봉’을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았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뮤지엄 산 관장)는 "69년의 달 착륙은 작가에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깨달음을 가져다줬다”며 "작가는 공간의 다이너미즘(역동성)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보았고, 이를 절제된 형태와 풍부한 색채로 빚어냈다”고 말했다.
 
신 큐레이터는 "한묵은 시공간과 생명의 근원을 성찰하며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창조한 선구적인 작가였다”며 "안타깝게도 현재까지는 이 작가에 대한 연구 논문 한 편이 없다. 이번 전시가 한묵 작가를 새롭게 돌아보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2019년 3월 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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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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