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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에 갇힌 멸종위기 ‘정가’ 서양 선율 입혀 대중 홀리다

[아티스트 라운지] 음악극 ‘적로’ 여창가객 하윤주
음악극 '적로'에서 하윤주는 두 대금 명인의 뮤즈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비한 캐릭터 ‘산월’맡았다. [신인섭 기자]

음악극 '적로'에서 하윤주는 두 대금 명인의 뮤즈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비한 캐릭터 ‘산월’맡았다. [신인섭 기자]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흐르고 또 흘러~.”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낯설고도 격조 높은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고운 한복 자태도 선녀 같다. 서울 돈화문국악당(예술감독 김정승) 첫 브랜드공연 음악극 ‘적로’(12월 30일까지)의 여주인공 산월 역을 맡은 ‘여창가객’ 하윤주(34) 얘기다.
 
배삼식 작가·최우정 작곡가·정영두 연출 등 국내 최고의 창작진이 뭉쳐 만든 ‘적로’는 일제 강점기 활동한 대금 명인 박종기와 김계선, 두 실존 인물의 우정을 통해 이 풍진 세상에 예술인으로서 산다는 것을 노래하는 무대다. ‘방울져 떨어지는 이슬(滴露)’ ‘악기를 통해 흘러나온 입김에 의한 물방울(笛露)’ ‘예술가의 혼이 서린 악기 끝의 핏방울(赤露)’이라는 의미를 제목에 두루 담아냈다. 국악에 스윙재즈와 현대음악이 섞이고 두 소리꾼이 판소리 만담하듯 극을 이끌지만, 이 무대를 지배하는 음악적 주인공은 산월이 부르는 ‘정가(正歌)’다. 민간 속요의 대척점에 있는 정가에 19세기 서양 예술가곡의 선율을 입혀 뽑아낸 산월의 신비한 소리엔 사람을 홀리는 마성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인 하윤주는 국립국악원 정악단, 퓨전국악그룹 퀸 등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업계의 ‘섭외 1순위’다. 하지만 정가가 대중적이지 않은 탓에 오랜 무명 생활을 겪다가 지난해 초연된 ‘적로’로 떴다. 2018 KBS국악대상 가악부문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적로’를 하면서 활동이 많아졌어요. 제게 인생작이 된 셈이죠. 음악적으로도 한 단계 성숙했구요. 음악적 근거지가 넓어졌달까. 하윤주라는 아티스트에 대한 신뢰감도 높아진 것 같아요.”
 
환상적인 고음과 현란한 시김새가 퍽 여성적으로 들리는 정가는 사실 남성의 예술로 시작됐다. 조선시대 사대부 계층이 자기 수양을 위해 즐겼던 풍류음악으로, 문묘·종묘제례악에서는 지금도 오롯이 남창가객의 몫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정가 ‘가객’은 전국에 손꼽을 정도다. 판소리, 경기민요 위주의 국악 성악계에서 ‘멸종’ 위기에 놓인 무형의 천연기념물인 셈이다. “국악인 100명 중 4명이 노래를 하는데, 2명은 판소리, 1.5명이 경기민요나 서도소리를 하고 0.5명이 정가를 하죠. 통계상 우리 또래에 활동하는 가객은 전국에 20~30명을 넘지 않아요.”
 
애초부터 무대를 위한 음악은 아니었다. 정신적 수양, 자기 성찰에 관한 노래일 뿐 대중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공감도 쉽지 않다. “자기를 뛰어넘어 내면이나 소리 이치를 잘 깨닫기 위한 노래거든요. 가사도 판소리, 민요는 문장 자체가 진행이 빠른데 우린 한 음절의 긴 호흡을 갖고 부르니까 시조 내용을 모르면 이해가 어려워요. 대중문화가 발달한 요즘 시대로선 전통 속에 갇혀있는 셈이죠.”
 
거친 목으로 토해내는 판소리나 구성지게 흐드러지는 민요와는 전혀 다른 신비하고 단단한 소리는 어떻게 얻어지는 걸까. 그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내면 수양을 하며 그 한 소리를 위한 노래를 불렀듯이 우리도 정가가 낼 수 있는 맑고 고운 음색에 관해 연구한다”고 했다. “차분하게 소리를 내기 위해 단전에서부터 나오는 길을 열다보면 정신과 몸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움직임도 없이 정적으로 앉아서만 부르던 노래다 보니 더 집중하게 되구요. 나의 내면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고, 그 소리로 인해서 듣는 청중은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갖게 될까에 집중하다 보면 내면의 혼이 건드려지는 느낌을 받죠.”
 
내면 수양 외에도 10년 이상 프리랜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정가를 어떻게든 대중에게 어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지만, 정가 자체에 감정 표현이 없다는 근본적 한계에 부딪혔다. “판소리처럼 희로애락 감정을 분출하는 게 아니라 절제하고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끌어내는 음악이거든요. 뿌리가 그런데 민요나 판소리처럼 즐겁고 흥겨운 무대를 만들려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죠. 전혀 어울리지 않더군요. 반대로 정가가 가진 차분하고 아정한 부분에서 승부를 봐야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던 차에 ‘적로’를 만났다. “여창가곡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최우정 작곡가는 19세기 서양 예술가곡의 선율을 끌어와 감정선을 미묘하게 건드리는 ‘모던 정가’를 창작해 ‘전통 안에 갇혀있던’ 정가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열어보였다. “19세기 서양 선율을 차용해 곡을 쓰고 한국 전통 창법을 입힌 거죠. 원래 감정을 절제하는 창법이지만, ‘적로’에서는 드라마에 녹아드는 서정적인 표현에 피아노·클라리넷 반주를 더하니 느낌이 달라요. 절제해 왔던 감정에 날개를 단 것 같달까요.”
 
남들과 다른 음악을 하니 희소가치에 비례해 소외감도 많이 느꼈다. ‘정가를 들려줄 자리가 없는 건 정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기회 있을 때마다 백방으로 뛰었다. 정가의 일종인 가사의 경우 전수자가 없어 명맥이 끊길 위기에 ‘긴급 보호대상’으로 지정될 정도라 초중학교 교육사업이나 일반인 무료강습에도 발벗고 나선다.
 
“정가는 국공립 단체에 자리도 얼마 없고, 거의 다 프리랜서인데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 있으니 그만두는 분들도 많거든요. 소리꾼들이 창극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듯, 정가도 극이나 현대적인 장르를 통해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적로’는 그런 욕심의 구름판이 됐다. 최우정, 배삼식과 개인 프로젝트 ‘소리의 정원’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 11월 국립국악원에서 공연한 ‘추선’에서 이별을 테마로 한 10곡의 창작 신곡을 선보였고, 곧 음반도 발매한다. ‘적로’는 내년 3월 유럽 진출도 추진 중이다.  
 
“‘적로’를 하면서 정가로 이렇게 서정적인 작업을 계속 해보고 싶었어요. 두 분 선생님께 큰 은혜를 입었죠. 할수록 피아노 선율과 여창정가가 참 잘 어울리고 서로 보완되는 성격이 있는 것 같아요. ‘추선’을 보러 온 친구들도 ‘너의 공연을 보기가 사실 힘든데 이번엔 한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고 하더군요. 이런 작업을 계속 확장시켜 가 보는 게 2019년 목표입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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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