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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문화참견] 정치적 올바름이 흥행 지도 바꾼다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2018년 할리우드를 특징짓는 대표작을 고르라면 단연 ‘블랙 팬서’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일 것이다. 각각 흑인 파워와 아시안 파워를 바탕으로 했다. 흥행에 성공했고, 속편 제작을 확정했다. 최초의 흑인 수퍼 히어로 주인공 영화인 마블의 ‘블랙 팬서’는 감독·배우의 90%가 흑인이다. 전 세계에서 13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최근엔 아카데미의 전초전인 골든 글로브에 작품상 등 3개 부문 후보에 올라 화제가 됐다. 수퍼 히어로 무비에 아주 인색한 골든 글로브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역시 감독과 출연진 대부분이 아시아계로, 싱가포르의 수퍼 리치 가문 배경의 로맨스물이다. 아시아인들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초호화 라이프를 구가한다. 8월 개봉 시 북미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블랙 팬서’ 때 미셸 오바마 대통령 부인이 지원 사격에 나선 것처럼, 이 영화는 아시아계 셀럽들이 상영관의 표를 사들이며 흥행을 기원하는 운동을 벌였다. 때마침 한국계 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맡은 테크 스릴러(tech-thriller) ‘서치’ 10대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한 넷플릭스 TV시리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함께 흥행해 ‘아시안 어거스트’란 말까지 나왔다. 아시아계가 주인공이면 이민자나 소수자의 아픔을 그리거나 코믹한 주변부 캐릭터였던 데서 벗어났다.
 
2016년 아카데미상이 백인 일색이라는 ‘화이트 오스카(white oscar)’ ‘공각기동대’의 스칼렛 요한슨 등 백인 배우가 동양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비판하는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 논란이 나온 지 2년만의 변화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화이트 워싱’을 비판하며 한국계 배우 존 조를 지지하는 ‘존조놀이’가 이어졌는데, 이번 ‘서치’의 주인공이 바로 존 조다.
 
할리우드에 부는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바람의 정점에는 젠더 이슈가 있다. 속편이나 리메이크작에서 기존의 남성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 성 역할에 균열을 내는 ‘젠더 스와프(gender swap)’물이 계속되고 있다. 여성 버전 속편 ‘오션스 에잇’(2018) ‘고스트 버스터즈3’(2016)가 대표적이다. 내년 3월에는 마블 사상 최초의 여성 주인공 수퍼 히어로물 ‘캡틴 마블’이 나온다. 주인공은 ‘룸’의 연기파 브리 라슨. 원더 우먼, 캣 우먼 등 섹시한 외모가 강조돼온 기존 여성 영웅과는 성격이 다르다. 마블은 만화 ‘아이언맨’에서도 영웅 토니 스타크의 자리를, 15세 과학 천재 흑인 소녀에게 물려준다고 선언했다.
 
올해 할리우드의 아시아 바람을 대표하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싱가포르의 갑부 집안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물이다. [사진 워너브라더스]

올해 할리우드의 아시아 바람을 대표하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싱가포르의 갑부 집안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물이다. [사진 워너브라더스]

연극계에서도 남녀 성별을 바꾸거나, 성에 대한 제약을 받지 않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 시도되고 있다. 올 4월 영국 극장 ‘셰익스피어스 글로브’는 여자 햄릿이 나오는 파격적인 ‘햄릿’을 선보였다. 젠더 프리 캐스팅을 위한 프로그램 ‘네로파’도 개발됐다. 대본 속 캐릭터를 남성, 여성, 중립으로 나누고 딱히 성별이 의미 없는 중립 역할은 남녀 동일 성비로 캐스팅하는 것이다.
 
해외문화계의 이런 PC바람은 높은 PC감수성을 원하는 관객과 시장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제작진 자체가 성적· 인종적으로 다양해진 것, 아시아 관객의 커진 티켓 파워 등과 관련 있다. PC가 다원주의를 추구하는 시대적 흐름을 넘어 흥행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 연예 기획사 CAA는 다양성을 고려해 배우를 캐스팅한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도 흥행한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또 이들이 최근 2014~17년 전세계 흥행 실적 상위 350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분석한 결과, 제작비 수준과 상관없이 여성 주연 영화가 남성 주연 영화보다 더 흥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화속 양성평등 평가 척도인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의 흥행성적이 더 높았으며,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 ‘쥬라기 공원’ ‘미녀와 야수’ 등 10억 달러 이상 벌어들인 영화들은 모두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 CAA 관계자는 “여성이 영화 관객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업계에서는 여성 주연 영화가 덜 성공한다고 예단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 블룸버그도 ‘블랙 팬서’의 성공에 주목하며 “할리우드는 다양성이 사업 성공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당신들도 팀을 구성할 때 시야를 넓히고, 여성 리더를 내세우고, 피부색 외에도 다양성을 추구하라”고 강조한 바 있다.
 
반면 국내 문화계의 변화는 더딘 편이다. 젠더 감수성 높은 영화를 여성관객들이 지지하는 팬덤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주류를 바꿀 정도는 아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처럼 자본 대 노동, 친미 대 반미, 재벌 대 서민 등 극단적인 선악 이분법에 남녀 대립쌍을 기계적으로 끼워 넣는 수준이다. 오히려 ‘애기씨’ 의병(김태리)을 주인공으로 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성취가 압도적이다. 한국 문화에 전례 없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선보였다. 특히 사랑 대신 대의를 택하고, 연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큰 뜻을 이룬다는 점에서 김태리는 전통적으로 남성 캐릭터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아직도 전통적 성 역할에 매몰되거나 PC감수성 낮은 드라마, 영화들이 부지기수다.
 
물론 PC 감수성과 예술적 자율성(표현의 자유)이 충돌하는 문제도 있다. 과도하고 기계적으로 PC 잣대를 들이대는 ‘PC 근본주의’가 창작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관객이, 시장이 이미 변했고 그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단 것이다. 100년 넘게 백인 남성 중심의 철옹성을 쌓아온 할리우드의 숨 가쁜 변화가 그를 웅변해준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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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