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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김정은 답방 카드, 낭비 말라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한 나라 정상의 적국 방문은 여간 대담한 결행이 아니다. 자신을 혐오하는 이들로 꽉 찬 곳에 찾아가는 건 사지(死地)에 뛰어드는 모험이다. 이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 악마화했던 인물과 돌연 화해했다가 어떤 내부 반발을 부를지도 모른다.
 
이런데도 적진에 뛰어들어 세상을 놀라게 한 정상은 왕왕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1959년 9월, 2주간이나 미국을 휘젓고 다녔던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이다. 그는 외모나 개방적 성향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빼닮았다. 당시 미국엔 그를 해치려는 인물이 2만여 명이라는 게 FBI 추산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의 본모습을 보고 싶다”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초청을 부탁해 결국 뜻을 이룬다.
 
키 1m60cm에 90㎏을 넘는 흐루쇼프가 도착하자 미국인들은 우스꽝스럽게 생긴 그를 깔봤다. 하지만 갈수록 미국인들은 그의 재치와 유머에 빠져들었다. 그는 미 의원들을 만나 “사마귀는 생겨도 어찌 못 하듯,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나, 핫도그를 맛보곤 “우주여행에선 소련이 낫지만, 소시지 만드는 건 미국이 한 수 위”라고 말해 주위를 웃겼다. 그가 가는 곳마다 백여 명의 기자가 몰렸고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였다. 여행이 끝날 무렵에는 소련에 대한 미국인의 반감이 누그러져 미·소 간에 평화가 깃들 거라는 낙관론까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후의 현실은 딴판이었다. 흐루쇼프의 방미 이후 미·소 관계는 개선되기는커녕 1961년 베를린 사태에 이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 직전까지 가는 최악의 상황으로 굴러떨어졌다.
 
반면, 해피엔딩으로 끝난 경우도 있었다. 1972년 전격적으로 이뤄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그런 사례다. 그는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을 때 기대했던 환영 인파가 보이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죽(竹)의 장막을 헤친 이 역사적 방중으로 20년 넘게 담쌓고 살았던 양국은 6년 뒤 정식 국교를 맺는다.
 
뭐가 달랐나. 흐루쇼프의 경우 그가 아무리 좋은 인상을 남겼어도 초강대국 간의 헤게모니 경쟁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면 닉슨의 방중 때는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가진 미·중 모두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한 지도자의 적국 방문만으로는 현실 정치의 큰 물길을 바꿀 수 없다는 얘기다.
 
연내 성사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언젠가 김정은의 답방이 이뤄지면 흐루쇼프의 방미 때와 비슷한 광경이 재연될 게다. 그의 소탈해 보이는 매력 공세에 언론이 푹 빠지고 당장 통일이 올 것 같은 집단 최면에 온 국민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흐루쇼프 때 목격했듯, 김정은의 답방만으로는 핵폭탄 하나 없어지지 않는다. 김정은 답방에 빠져 현실을 망각해선 안 되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그러니 답방이 미뤄지는 게 현 정권에도 잘된 일일 수 있다. 김정은 답방은 흥행이 확실한 보증수표다. 흐루쇼프가 미국에 갔을 때도 당시 아이젠하워의 지지도는 10%나 치솟았다. 하지만 명심할 건 답방 효력도 단 한 번에 그칠 거라는 사실이다. 뭐든 쉽게 식상하는 게 대중의 입맛이다. 김정은의 남쪽 방문도 다를 리 없다.
 
답방 카드는 따라서 신중히 사용돼야 한다. 무릇 좋은 패는 아껴 뒀다 꼭 필요할 때 쓰는 법이다. 예컨대 북한의 비핵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남쪽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할 때 그가 서울에 오면 그처럼 카드를 꺼낼 적기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비핵화 조짐이 없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정부가 이처럼 중요한 이벤트를 조급하게 정치적 인기 만회를 위해 낭비한다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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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