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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의 퍼스펙티브] 와해 위기의 WTO 체제, 한국이 개혁 주도하자

WTO 개혁
올해 마지막 달을 그래도 반가운 소식으로 열었다. 지난달 30일부터 이틀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정상들은 ‘세계무역기구(WTO) 개혁(reform)’을 추진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나아가 차기 정상회의에서 그 “진전 사항을 검토”하기로 합의하였다. 주요국 정상 간 국제회의에서 WTO 개혁이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은 처음이다. 중요한 진전이다. 2018년 보호무역주의 홍수에 그로기 상태에 처한 WTO 체제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시도다.
 
물론 궁극적으로 WTO 164개 회원국의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20개국은 전 세계 교역량의 75%를 차지하는 핵심 주도층이다. 이들 간 합의는 이제 상당한 추진력이 확보되었다는 뜻이다. 급물살을 탈 기세다.
 
 
‘미국 달래기’에서 출발한 최소공배수 찾기
 
이 역시 그 출발은 올 초부터 진행된 미국의 압박이다. 미국은 WTO 체제 와해도 괘념치 않는다는 시그널을 계속 보내고 있다. WTO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항소기구(Appellate Body) 재판관 선임을 미국이 계속 반대하여 지금 총원 7인 중 4인이 공석이다. 하나의 분쟁을 다루는 데 재판관이 3명이 필요하니 이제 마지노선이다. 이대로라면 2019년 12월 초에는 지금 3명 중 2명도 퇴임하고 1명만 남아 송두리째 마비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에 미국을 달래기 위한 논의가 여러 루트로 진행되고 있다. 유럽연합(EU)·캐나다 등이 앞장서 어떻게든 미국의 요구를 반영하고 동시에 다른 나라들도 수용할 만한 ‘최소공배수’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희미한 불빛이 보인 건 지난 10월 25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개최된 12개국 회의다. 첨예하게 맞서는 미·중을 빼고 나름 각 지역을 대표하는 ‘합리적’인 12개국이 모인 회의다. 호주·브라질·캐나다·칠레·EU, 일본·케냐·멕시코·뉴질랜드·노르웨이·스위스, 그리고 우리나라다. 이들 그룹에 우리도 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서의 성과가 이번 G20 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비록 미국 달래기에서 시작하였으나 위기에 처한 교역체제를 살리는 마지막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과거와 달리 여러 국가의 다급함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런 정제 과정을 거친 ‘최소공배수’는 무엇인가. EU·캐나다 등 이 논의 주도국들은 진행 상황과 여러 제안서를 홈페이지에 상세히 게시하고 적극 홍보에 나서고 있다. 그 내용을 파악하기 쉽다. 줄이고 줄인 최저치의 대략적인 윤곽이 거기에 나타나 있다. 바로 분쟁 해결, WTO 통보 제도, 그리고 수산 보조금이다.
 
 
무역분쟁 절차 재정비
 
먼저 국가 간 재판 절차를 바꾸는 문제다. 미국의 가장 큰 관심 사항이다. 너무 짧은 심리 일정을 늘려 현실화하고, 소송 대신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제도를 활성화하는 아이디어 등이 올라 있다. 합리적이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매년 그해 내려진 판정에 대해 평가 회의를 갖고, 항소심이 당사국 ‘국내법’을 평가하는 권한을 제한하자는 제안도 동시에 논의되고 있다. 지금 대부분의 민감한 분쟁이 국내 법령과 관련되어 진행되는데 그 부분을 이제 통제하겠다는 뜻이다.
 
재판의 독립이라는 측면에서는 개선보다 개악에 가깝다. 그래도 일단 현재의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중론이 모이는 분위기다. 새로운 제도하에서는 지금과 사뭇 다른 환경에서 국가 간 쟁송이 진행될 것이다.
 
 
통보 제도 강화와 징계
 
WTO 협정문을 바꾸기 힘드니 그 대안으로 각국이 자국 법령과 상황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WTO에 통보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방안 역시 가장 쉬운 주제 중 하나다. ‘이실직고’(以實直告) 제도의 도입이다. 투명성(transparency) 강화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되는 논의이니 여기에 대놓고 반대할 국가는 없다.
 
그리고 미통보 국가에는 분담금 증가, 회의 참여 제한, 국적자의 주요 기구 임명 제한 등 실질적 제재를 가한다.
 
사실 이러한 통보 제도의 숨은 의도는 각국의 산업 지원 정책에 대한 자료 확보와 공개다. 각국이 유지·운용하는 다양한 보조금 조치에 대한 공론화 작업으로 일종의 ‘망신주기(naming and shaming)’ 효과를 거두어 간접적으로 지원 조치 감축을 유도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심지어 미통보 지원 조치는 그 사실만으로 협정 위반으로 간주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이 통보 제도가 주로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니 이 제안에 대한 중국의 거부감은 당연하다. 다만 투명성 강화라는 맥락에서 진행되니 여기에 공개적으로 반박하기는 쉽지 않은 형국이다.
 
 
수산 보조금 규제와 어족 자원의 보호
 
방향을 조금 틀어, 그간 난항을 겪어 온 새로운 규범 도입 부분에서도 무언가 상징적으로 한 꼭지는 필요하다. 여기에서 타협에 제일 근접한 주제는 수산 보조금 (fisheries subsidies) 규제다. 각국이 수산업에 제공하는 지원금을 제한하는 규범이다. 이러한 지원금이 전 세계 해역에서의 남획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의가 그래도 그간 진전이 가장 많았고 국가 간 이견도 적다. 멸종 위기에 처한 어족 자원을 보호하자는 데 나서서 반대할 수 있을까. 마지막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그럴싸한 타결이 가능하다. 또 타결 후 통상 규범을 통한 ‘환경 보호’라는 적절한 포장으로 홍보하기도 좋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감 회복부터
 
그간 속절없이 무너졌던 다자주의 체제가 반전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이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렵사리 잡은 마지막 논의의 장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WTO 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이 아니라 최소한의 자신감과 신뢰의 회복이다. 일단 간단하고 쉬운 의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 성과를 도출하는 것이 관건이다. 2018년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우리를 비롯한 여러 국가가 다자주의 체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하였다. 조금만 불씨가 지펴진다면 잃어버린 열정이 서서히 되살아날 수도 있다.
 
아직 첩첩산중이다. 미국 달래기에서 시작하였고 미국을 어떻게든 움직여야 하나 도저히 다른 나라들이 수용하기 힘든 조건을 미국이 요구한다면 지금 논의도 다시 파국에 이를 것이다. 다른 국가들도 자국 입장만 되풀이한다면 이 마지막 기회도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내년 이맘때 작동 정지된 WTO이다.
 
현재 WTO 협상은 모든 국가가 모든 사항에 합의하여야 타결된다는 소위 ‘일괄 타결 방식’(Single undertaking)을 따르고 있다. 시대착오적 제도라는 점에 대부분 동의하나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그러하다. 결국 여러 국가가 얼마나 성의를 갖고 협상에 임하느냐에 지금 실험의 성패도 달려있다. 예측하기 힘들다.
 
이번 부에노스아이레스 G20 회의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타이밍도 적절하다. 내년 6월 말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되는 차기 G20 회의까지 준비하여 중간 점검을 하고, 이를 토대로 후속 작업을 하면 2020년 6월 카자흐스탄에서 개최 예정인 제12차 WTO 각료회의에서 최종 정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만약 이 시간 계획이 지켜지면 2020년 6월 각료회의 이후 잔여 핵심 사항들에 대한 새로운 협상의 출범도 기대할 수 있다.
 
 
새로 열린 장에 적극적 참여 필요
 
우리에게도 중요한 변화다. 현재 논의되는 수준 정도로 개혁이 이루어지더라도 우리에게 상당한 파급 효과가 따른다. 가령 현재 우리 상황에서 여러 제도를 정기적으로 WTO에 통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우리를 주시하는 주요 교역국들이 작심하고 통보 내용을 문제 삼기 시작하면 그 부담은 걷잡을 수 없다.  
 
연간 근 7000억원에 이르는 수산 분야 지원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수산 보조금 문제 역시 큰 고민거리다. 분쟁 해결 절차의 역학 관계를 바꾸는 것도 우리에게는 새롭다.
 
어쨌든 여러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최근 새로운 논의 과정에 우리나라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은 좋은 신호다. 다른 나라의 눈에 우리가 WTO 개혁 논의의 중요한 참여국으로 비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지금 계획이 제대로 굴러가 2020년 이후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면 이를 서울에서 개시하여 보는 것도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서울 라운드’가 될 수도 있겠다. 새로운 규범 형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좋은 기회다.
 
2018년 한 해 통상 문제가 무던히도 우리 속을 끓였다. 이제 2018년이 저물어 간다. 마지막 순간에 그래도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분위기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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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