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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선비도 나가 싸웠다, 조총 무장한 왜적 막으러

기자
송의호 사진 송의호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37)
1592년 4월 22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9일째. 부산포로 상륙한 왜군은 북상을 거듭했다. 조선은 온 나라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관군은 달아나고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북 고령지역 한 선비가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한다.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도암서원 왼쪽 산자락에 자리한 김면 의병장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사진 송의호]

도암서원 왼쪽 산자락에 자리한 김면 의병장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 [사진 송의호]

 
송암 김면(1541∼1593)이다. 송암은 향리에서 학문을 닦던 선비였지만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즉각 집안 종을 불러 모았다. 주변을 다니며 왜적과 싸울 사람도 규합했다. 창이나 작지를 들고 나선 장정이 79명에 조카가 15명이었다. 의병을 조직한다. ‘민병대’다.
 
김면 의병부대는 6월 9일 고향인 낙동강 개산포에서 첫 전과를 올린다. 왜군은 이미 경북 내륙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8시쯤 왜군 선단이 달성 현풍에서 낙동강 하류로 내려왔다. 지형에 밝은 의병들은 강변에 매복해 있다가 왜선을 급습한다. 배에 타고 있던 왜군은 두세 명이 남고 모두 죽었다. 
 
김면 의병부대가 첫 전과를 올린 낙동강 개산포 전투지에 세워진 개호정(開湖亭). 정자 아래가 낙동강이다. [사진 송의호]

김면 의병부대가 첫 전과를 올린 낙동강 개산포 전투지에 세워진 개호정(開湖亭). 정자 아래가 낙동강이다. [사진 송의호]

 
김면 부대는 이어 내려오는 적선 1척을 다시 포획한다. 거기엔 뜻밖에도 ‘보물’이 실려 있었다. 그중에는 세조의 이름이 적힌 금지장자(金紙障子)도 있었다. 그는 전리품을 초유사(招諭使, 전시 민심 담당) 김성일에 보내 임금이 머무는 곳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한다. 김면 부대가 낙동강을 물길로 활용하던 왜적에 일대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 무렵 왜군은 경북 성주 등지에 주둔하며 낙동강을 이용해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전라도 진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송암은 이후 전라도로 가는 길목 거창으로 옮겨 병력을 더 모은다. 장정이 더 규합됐다.
 
왜군은 전라도 진출이 어려워지자 김천 지례로 후퇴해 그곳의 곡물 대여 창고인 사창(社倉)과 객사, 관아를 점거한다. 김면은 8월 1일 이번에는 사창 일대를 포위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는 화공을 펼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술이다.
 
김면 의병장을 배향하고 있는 경북 고령 도암서원(道巖書院)의 전경. [사진 송의호]

김면 의병장을 배향하고 있는 경북 고령 도암서원(道巖書院)의 전경. [사진 송의호]

 
그는 지례를 수복한 뒤에는 정인홍과 함께 성주성의 왜군을 공격한다. 탈환에 5개월이 걸린다. 그의 지략을 지켜본 선조 임금은 김면을 일약 ‘경상도의병대장’으로 임명한다. 김면은 이렇게 1593년 3월 진중에서 지병으로 순국할 때까지 30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본래 병약했지만 분연히 일어나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김면 의병장을 배향한 고령 도암서원(道巖書院)을 답사했다. 송암의 후손인 고령 김씨(대종회장 김용인)의 성역이다. 서원 앞에 송암 선생의 어록 여덟 글자가 바윗돌에 새겨져 있었다. ‘只知有國 不知有身(지지유국부지유신, 나라가 있는 줄 알았지 내 몸이 있는 줄 몰랐다)’. 그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이다.
 
도암서원 앞에 세워진 김면 의병장의 어록비. [사진 송의호]

도암서원 앞에 세워진 김면 의병장의 어록비. [사진 송의호]

 
그는 이어 눈을 감으면서도 (의병들에게) ‘내가 죽거든 군중(軍衆)과 좌우에 알리지 말고 가만히 신창으로 옮겨 발상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서원 옆 산자락에 묘소가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향리를 지킨 덕망 있는 선비들은 지역민의 지지를 받으며 왜군의 허를 찔렀다. 임란 연구자들의 견해다. 일본에는 사무라이가 있었지만 조선에는 의기(義氣)로 무장한 선비가 있었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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