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선데이 칼럼] 여야에 보내는 엥겔스 편지

이훈범 부국장

이훈범 부국장

“나는 왠지 경쟁 당들의 지지부진과 우유부단으로 말미암아 우리 당이 어느 날 갑자기 정권을 잡게 되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순 없으나 소시민들에게는 흥미로운 정책들을 시행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드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53년 4월 12일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탄핵 후 처음으로 25%를 넘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퍼뜩 오래 전 책에서 읽었던 이 내용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난해 먼저 떠올렸어야 하는 기억이었다. 현 정권이야말로 전 정권의 자살골로 권력을 주운 케이스 아니었던가. 어째서 당시에는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이내 풀렸다. 언감생심 ‘엥겔스의 예감’조차 할 수 없던 상황에서 ‘최순실 사태’라는 급반전이 이뤄진 까닭이었으니 말이다.
 
부랴부랴 책을 뒤졌다. 무심히 흘려버렸던 게 분명한 다음 내용은 이랬다.
 
“그럴 경우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민중에게 떠밀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을 우리 자신이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를 실험해야 할 테지.”
 
어라? 이것 봐라. 점점 더 지금 정권의 모습에 다가가는데.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진보적 정책들을 준비도 없이 서둘러 시행하다 그 필연적인 후유증에 허둥대고 있는 모습 말이다. 이미 엥겔스의 예상은 거기에까지 다다르고 있다.
 
“그렇게 되면 머리가 돌아버리고 당연히 반작용이 일어나겠지. 세상이 역사적 판단을 내릴 수 있기 전까지 우리는 사나운 부류로 인식될 것이고 거두절미된 채 짐승 취급도 받을 수 있겠지. 아주 한심한 노릇이네.”
 
정말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한심할 터다.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과 주당 52시간 근로제가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 선의와 노력은 거두절미된 채 반발과 비난 세례가 쏟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후유증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힘의 누수가 없는 정권 초기에 바짝 서두르지 않으면 좀처럼 시행하기 어려운 문제인 까닭인데 말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예상을 한 만큼 엥겔스는 대책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그런데도 나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일이 전개되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네. 그러니 이런 가능성에 대비해 우리 당이 역사적으로 혁명을 복권시킬 근거를 마련해두는 게 상책일 듯하네.”
 
여기서 엥겔스가 말하는 혁명이란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1917년 러시아 혁명 같은 게 아니다. 아직은 그저 일반적인 사회 개혁을 일컬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준비를 해둬야 한다는 것이다. 변혁의 반작용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불행하게도 현 정권은 그럴 준비가 안됐고 그럴 실력도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10년 가까운 보수 정권의 헛발질(?)에도 비난만 했지 대안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공짜는 어디에도 없다. 그럴수록 준비가 안됐음을 인정하고, 밑돌부터 차근차근 괴며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알프레드 마셜이 『경제학 원리』에서 인용했듯 “자연에는 결코 갑작스러운 비약이 없는 것(Natura non facit satum)”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자. 엥겔스를 떠올린 이유가 한국당 지지율이었으니 말이다. 한때 그 당의 대표를 지냈던 사람은 대통령 탄핵 이후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지지율 25%선을 넘어서자마자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외쳤다. 그러면서 탄핵된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의 선봉에 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대통령은 되고 싶었으나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하기 싫었던 사람에게 빌붙어 자신의 영달만을 도모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던 이른바 ‘친박계’ 의원들과 연대하기 위해서다. 오직 ‘반문(反文)연대’를 구성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그걸 보수 통합이라 여긴다면 보수 유권자들에게 절망만 안길 뿐이다. ‘친박 신당’이라는 기괴한 말까지 나돈다. 단언컨대 그 이슈로 전당대회를 치른다면 또 한 번 유권자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당이 알아야 할 것은 엥겔스의 예감이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1883년 마르크스가 죽기 전까지 공산당은 실재하지도 않았다. 레임덕은 여전히 희망일 뿐일 수 있으며, 레임덕을 바라기 전에 정말 레임덕이 왔을 때 내놓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려 힘써야 한다는 말이다.
 
정의로움과 정의를 주장하는 건 다르다. 정의롭다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고, 정의를 주장하는 건 남이 할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선 내가 할 일을 하고 남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게 순서 아니겠나. 그게 곧 여야가 함께 들어야 할 엥겔스의 대안이기도 하다.
 
이훈범 부국장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