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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공포의 균형’으로 핵전쟁 막으려던 닉슨, 롱 교수에 SOS

1973년 코넬대 과학기술사회(STS) 연구소에서 초빙교수로 있는 동안 프랭클린 롱 교수로부터 과학기술자의 뚜렷한 주관과 사회의식을 배웠다. 롱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과학기술을 활용해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신념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핵무기의 위험성을 깨달은 뒤로 그 확산을 막는 핵확산금지조약(NPT) 운동에 뛰어들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창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에도 참여했다. 코넬대에 STS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교육에 열정을 쏟은 것도 과학기술을 평화적으로 활용해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자는 취지였다.  
1972년 5월 26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모스크바에서 탄토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에 서명한 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악수하고 있다. 정치인인 닉슨은 핵전쟁을 막으려면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막으려면 서로 핵무기를 방어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 ‘공포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기술자인 프랭클린 롱 교수는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핵무기 방어능력을 단단히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롱 교수는 71년 닉슨의 국립과학재단 이사장 재안을 거절했다 [중앙포토]

1972년 5월 26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모스크바에서 탄토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에 서명한 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악수하고 있다. 정치인인 닉슨은 핵전쟁을 막으려면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막으려면 서로 핵무기를 방어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 ‘공포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기술자인 프랭클린 롱 교수는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핵무기 방어능력을 단단히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롱 교수는 71년 닉슨의 국립과학재단 이사장 재안을 거절했다 [중앙포토]

 
그는 대통령 과학자문위원을 비롯해 여러 공직을 맡았지만, 뜻이 맞지 않으면 나가지 않았다. 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그를 연방 기관인 국립과학재단(NSF)의 이사장으로 지명했지만 고사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고 대통령을 설득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중히 거절했다. 당시 닉슨은 핵전쟁을 막으려면 미국과 소련이 서로 핵무기를 방어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 ‘공포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롱 교수는 과학기술을 총동원해 핵무기 방어능력을 단단히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과학기술의 힘과 가치를 알고 이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1972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1) 서명식 장면. [AP=연합뉴스]

1972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략무기 제한협정(SALT 1) 서명식 장면. [AP=연합뉴스]

 
닉슨은 72년 5월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과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을 맺고 전 국토를 지키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금지하는 데 동의했다. 양국은 수도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기지 한 곳에만 각각 100기의 ABM을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롱 교수는 이를 과학기술과 경제력이 떨어지는 소련의 계략에 넘어간 것으로 여겼다. 미국은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이 협정에서 탈퇴했다. 전면적 핵전쟁 가능성은 작아졌지만 ‘불량국가’에 의한 핵 공격 가능성이 커져 ‘미사일 방어망(MD)’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1973년 미국을 방문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왼쪽)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다. 당시는 데탕트(긴장완화) 시대의 절정이었지만 소련 경제는 내부적으로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먀 더 이상 군비 경젱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에 소련은 기만전술과 평화공세를 총동원하며 버텼지만 붕괴를 1991년까지 미뤘을 뿐이다. [중앙포토]

1973년 미국을 방문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왼쪽)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다. 당시는 데탕트(긴장완화) 시대의 절정이었지만 소련 경제는 내부적으로 무너지기 직전이었으먀 더 이상 군비 경젱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에 소련은 기만전술과 평화공세를 총동원하며 버텼지만 붕괴를 1991년까지 미뤘을 뿐이다. [중앙포토]

 
당시 닉슨의 공직 제안을 사양한 롱 교수의 행동은 과학기술계의 양심으로 여겨졌다. 그는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출 때를 아는 원칙과 소신의 과학기술자였으며 정책 입안자였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74년 8월 물러났던 닉슨 대통령과는 달랐다.  
 
롱 교수가 일한 코넬대는 미국 동부 명문대 그룹인 아이비리그 대학 중에서 과학기술 분야가 가장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코넬대에서 롱 교수는 STS연구소와 함께 ‘개발도상국 과학기술 정책 연구실(PSTDN)’을 운영하며 과학기술을 통해 개도국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국제적인 ‘과학으로 더불어 살기 운동’을 전개한 셈이다. 내가 아프리카 케냐의 에너지 고문을 맡고 최근에는 현지 과학원 설립도 지원하면서 국제 과학기술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은 당시에 받은 영감 때문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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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