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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IMF 탓 망했다?···'국가 부도의 날'은 팩트 파산의 날

[안혜리의 논설위원이 간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왜 사실을 왜곡했나 
지금으로부터 21년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 첫 주말에 157만명을 넘어서는 등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IMF행을 막으려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팀장으로 나오는 김혜수. [사진 CJ]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IMF행을 막으려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팀장으로 나오는 김혜수. [사진 CJ]

IMF행을 막기 위해 무능한 경제수석과 사악한 차관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팀장 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는 개봉 전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는 장치를 다 포기한 굴욕적 협상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며 "반드시 재미있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이 (이런 사실을 보고) 알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관객들은 '잘 만든 다큐멘터리'라며 세계화에 시동을 걸었던 과거 보수정권에 돌을 던지며 분노한다. 문제는 극적 재미를 위한 각색 수준을 넘어 명백한 사실조차 비틀어 의도적으로 반기업·반미 정서를 부추긴다는 점이다. 또 한편의 혹세무민형 정치영화의 탄생을 뒤쫓아 봤다.  
영화 속 한국은행 총장과 청와대 경제 수석은 무능하고 재정국 차관은 사악하다. [사진 CJ]

영화 속 한국은행 총장과 청와대 경제 수석은 무능하고 재정국 차관은 사악하다. [사진 CJ]

'국가부도의 날' 개봉 첫날인 지난달 28일 저녁 상영관을 꽉 채운 관객들 틈에서 영화를 봤다. 배우들의 안정적 연기에다 영화적 재미도 적지 않았으나 몰입할 수 없었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사실 왜곡 때문이었다. '검은 사제들''마스터'같은 흥행작을 냈던 중견 제작사인 '영화사 집'은 영화 도입부에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제작되었지만 모든 인물과 사건은 허구로 재구성되었다'는 자막을 띄워 왜곡 시비를 피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정작 관객들은 등장하는 사건을 '팩트'로 인식한다. 미도파·한보·기아 등 부도로 쓰러진 기업이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데다 중간중간 실제 TV뉴스 화면이 계속 반복되고 후반부엔 당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자막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재경원을 재정국으로, 한국은행 총재를 총장으로 슬쩍 바꿨지만 관객은 당시의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강만수 재경원 차관, 윤증현 금융정책실장, 이경식 한은 총재 등 실존인물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다.  

1997년 12월 8일 휴버트 나이스 기금 협의단장(왼쪽)이 한국을 찾아 한국측 협의단장인 강만수 재경원 차관과 만나 협의일정 등을 논의했다. [중앙포토]

1997년 12월 8일 휴버트 나이스 기금 협의단장(왼쪽)이 한국을 찾아 한국측 협의단장인 강만수 재경원 차관과 만나 협의일정 등을 논의했다. [중앙포토]

실제로 관람 후기엔 '어려서 몰랐는데 영화 덕분에 그때를 알게 됐다'거나 '교육용으로 손색없는 영화''웰메이드 팩폭(사실을 직설적으로 말한다는 '팩트 폭행'의 준말)''과장 하나 없이 현실을 잘 녹여낸 영화'라는 식으로 다큐로 받아들인 평이 대다수를 이룬다.  

러닝타임 2시간짜리 영화가 새롭게 알려줬다는 그때의 진실이란 이런 거다.  

'고용 불안과 빈부 격차 같은 작금의 모든 경제 문제는 IMF구제금융 탓이고, 재벌과 결탁한 경제 관료(재정국 차관)가 노동자를 정리해 기업을 살리겠다는 의도로 일부러 IMF를 끌어 들여 서민의 고통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이 됐다. '

훗날 '위장된 축복'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IMF 손을 빌려 우리 손으로 못한 경제 수술을 한 건 맞다. 하지만 '고의 IMF행'은 너무 나갔다.  
후반부엔 아예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으로 나라 경제를 살리고자 했으나 국민들의 금은 기업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는 자막으로 선한 서민과 악한 기업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분노를 자극한다. IMF 사태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음모론까지도 재소환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짧은 영화에 담느라 아무리 선악구도를 극대화했다해도 지나치게 악의적인 역사 왜곡이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일부 사실을 바꿨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객관적 사실을 끼워넣어 교묘하게 다른 거짓까지 전부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프로파간다(선전선동)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다. 책상 위 서류나 컴퓨터 화면 속 자료 문구 하나까지 세심하게 팩트 체크를 했다는 제작진이 불과 20년 전 사실을 왜 이렇게 엉터리로 다룰 수밖에 없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관점으로 과거를 취사선택해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색 논란을 일으켜온 CJ엔터테인먼트가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라는 게 혹시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우연이겠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 국회에서 "1997년 11월 21일 IMF구제금융 신청으로 국민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디고 버텨 위기를 극복해냈고 국가 경제는 더 크게 성장했지만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다"고 연설한 직후 촬영이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 1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마친 뒤 김무성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IMF 이후 망가진 국민의 삶과 적폐 청산을 얘기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1월 1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마친 뒤 김무성 의원과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IMF 이후 망가진 국민의 삶과 적폐 청산을 얘기했다. [중앙포토]

2017년 초 신예 엄성민 작가의 시나리오를 접하자마자 제작을 결정했다는 영화사 집의 이유진 대표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무작정 서울 논현동에 있는 영화사로 찾아갔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마주 앉은 이 대표는 "난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고 이 영화도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며 "그렇게 보였다면 영화를 못 만든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또 "CJ와는 과거 여러 작품을 같이 해봤지만 정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겁이 많은 조직"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존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특정인을 지나치게 악인으로 묘사하고 IMF행을 지나치게 선동적으로 해석한 이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재정국 차관은 재벌과 결탁해 막을 수 있었던 IMF를 끌어들이는 사악한 인물이다. [사진 CJ]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재정국 차관은 재벌과 결탁해 막을 수 있었던 IMF를 끌어들이는 사악한 인물이다. [사진 CJ]

CJ측의 공식 입장도 이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CJ 관계자는 "영화사 집은 정치적 색채가 없을 뿐더러 대표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 걸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는 "통상 처음 아이디어 구상에서 개봉까지 길게는 4~5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개봉할 때의 정치적 함의까지 예측하면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며 "과거 논란이 된 작품 한두 편 때문에 매번 정치적이라는 착시효과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돈이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다시 말해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해도 여전히 찜찜하다. 순전히 돈벌이를 위해 엄연한 사실을 왜곡해 정치적으로 편향된 작품을 만들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문 대통령의 관점대로 모든 악의 근원을 IMF로 규정하다보니 기본 전제부터 틀린 채 출발한다. 사실 당시 재경원 관료들은 어떻게든 IMF로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관료의 사익을 추구하려고 어느날 갑자기 IMF행을 결정한 게 아니다. 오히려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수석은 IMF행을 지연시킨 데 따른 책임을 추궁받았고, '환란 주범'으로 감옥에 가기까지 했다.  

'환란 주범'으로 감옥에 갔던 강경식 전 부총리(오른쪽)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이 1998년 보석으로 풀려나 서울구치소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굳은표정을 짓고 있다. [중앙포토]

'환란 주범'으로 감옥에 갔던 강경식 전 부총리(오른쪽)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이 1998년 보석으로 풀려나 서울구치소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굳은표정을 짓고 있다. [중앙포토]

김영삼(YS) 대통령으로부터 IMF체제를 물려받은 김대중(DJ) 정권에서 '위기 해결사'로 불리며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했던 이헌재 전 부총리는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이렇게 썼다.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다. 기업들이 무서운 줄 모르고 돈을 빌려 과잉 투자를 했고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을 믿고 돈을 빌려줬다가 별안간 못 믿을 나라라는 인식이 퍼지며 썰물처럼 돈을 뺀 게 위기의 본질이다."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특별대책반이었던 허경욱 전 기획재정부 차관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문제를 몰랐던 게 아니라 대선을 앞두고 여야간 대립이 극심해 정치 리더십이 실종하면서 우리 거버넌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또 "불난 집에 달려온 소방차한테 '소방차'위기라고 하지 않는다"며 "IMF때문에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비켜가는 일"이라고 했다. 불 끄러 온 소방관이 귀중품을 물에 적셨다 해도 소방관 도움으로 불을 끈 것은 여전한 사실이라는 얘기다.  

1998년 1월 청와대에서 미셸 캉드쉬 IMF총재를 접견하는 김영삼 대통령. [중앙포토]

1998년 1월 청와대에서 미셸 캉드쉬 IMF총재를 접견하는 김영삼 대통령. [중앙포토]

영화엔 마치 경제관료에게 속은 것처럼 스치듯 묘사되지만 사실 IMF위기엔 YS의 오만과 무능도 크게 한몫했다. 경제팀에게 IMF행을 처음 보고받은 1997년 11월 8일에도 YS는 경제가 아닌 자신의 정치적 안위와 관련된 사안으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급속도로 무너져가는 경제 말고 딴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말이다.  

영화와 별개로 걱정스러운 건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지금 또다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3일 "경제상황이 어렵고 일자리가 줄어들어 아우성인데, 문 대통령의 마음은 경제 쪽에 있지 않은 것같다"고 지적한 것처럼 말이다.  

위기를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도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최범수 전문위원은 은행 대출의 15%가 6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이라는 통계를 내고 사전에 경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자료가 언론에 흘러나가자 이후 부실채권 관련 통계를 아예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문 정부는 원하는 경제 통계가 나오지않자 아예 통계청장을 갈아버렸다.  

DJ 비서를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은 '국가부도의 날'을 관람한 뒤 페이스북에 "위정자들의 오도된 경제현장 읽기는 잘못된 경제정책의 시작이자 국가부도의 날 예비 초청장"이라며 "문 대통령에게 잘못된 경제정책이 얼마나 국가와 국민에게 큰 재앙인가를 직접 목격해 보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고 썼다.  

혹자는 영화는 영화일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치 선동가 괴벨스가 러시아의 1차 혁명을 그린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을 보고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볼셰비키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만 봐도 영화의 정치적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말이다. 영화의 정치성을 다뤘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도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고, 우리 시대의 유력한 정치적 매체는 영화"라고 하지 않았나.  

제대로 된 사실 기반 위에서 역사적 교훈을 주는 대신 얄팍한 이념적 편향성으로 관객을 선동하는 영화가 흥행 가도를 달리는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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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