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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시비 세운 일본 교수 “훌륭한 시인 기리는 건 당연”

[SPECIAL REPORT] 시계 제로 한·일 관계 … ‘역지사지’ 지식인들
‘센다이에서 김기림을 생각하는 한·일 시민 네트워크’ 소속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일본 센다이 도호쿠대학에서 김기림의 시비 ‘바다와 나비’ 제막식을 했다. [사진 주센다이 총영사관]

‘센다이에서 김기림을 생각하는 한·일 시민 네트워크’ 소속 회원들이 지난달 30일 일본 센다이 도호쿠대학에서 김기림의 시비 ‘바다와 나비’ 제막식을 했다. [사진 주센다이 총영사관]

한·일 관계가 시계 제로 상태다. 지난 9월 30일 대법원의 첫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이어 지난달 21일엔 화해·치유재단 공식 해산, 29일엔 두 번째 대법원 배상 판결이 나오면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이후 최대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일 관계 빙하기의 시작이라는 말도 나온다. 정치에선 지지층을 의식해 대안 없는 결정을 쏟아내고, 상대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며, 정치인들은 연일 험한 말을 쏟아내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은 오늘도 만나고 헤어지고 또다시 만나고 있다. 지난달 30일 일본 센다이 도호쿠(東北)대학에서는 ‘한·일 시민 네트워크’가 일본 강점기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김기림(金起林·1908~?)을 기리는 시비를 세웠다. 일본 내에선 윤동주·정지용 시인에 이어 세 번째다. 시인 김기림은 1936~39년 이 대학을 다녔다. 같은 날 도쿄에선 2010년 조선 왕실의궤 반환에 결정적 기여를 한 고(故)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전 관방장관 추도식에 그가 ‘정치적 스승’이라고 불렀던 최상용 전 주일대사가 추도사를 했다. 그들을 만나 지금과 앞으로의 한·일 관계에 대해 얘기를 들어봤다.
 
마쓰타니 교수

마쓰타니 교수

지난달 27일 센다이 도호쿠가쿠인(東北學院)대학에서 만난 마쓰타니 모토카즈(43) 교수는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한국학을 강의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마쓰타니 교수는 도쿄대(석사)-하버드대(박사)에서 한국 근대사를 전공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 알게 된 한국인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이었다고 했다.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와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이었던 작은아버지는 한국의 민주화 지원에 열성적이었다. 마쓰타니 교수는 “아버지는 목회를 하시면서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의 화해를 위해 고향 후쿠시마에 국제교류센터라는 작은 단체를 만들었다. 나는 농업 기술이나 일본어를 배우러 온 한국,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학생들과 같이 살았다”며 “자연스럽게 한국인 형·누나와 어울리면서 한국에 대한 친근감과 관심이 생겨 대학 때 연세대로 유학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가 보니 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말해 준 이상적인 한국과는 달랐다”면서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정치, 사회, 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커졌고, 결국 한국 연구자가 됐다”고 덧붙였다.
 
김기림 시비 건립에 참여한 계기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중국의 지성으로 추앙받는 루쉰이 도호쿠대 유학생이었다. 도호쿠대에 루쉰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 15년 전쯤 일본을 방문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은 일부러 시간을 내 센다이를 찾아 헌화했다. 중·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루쉰 유학 당시(1902년 즈음) 그를 아꼈던 후지노 교수라는 분이 계셨다. 루쉰은 중국으로 돌아간 뒤 그를 기리는 글을 썼고, 지금 중국 교과서에 그 글이 실려 있다. 김기림 시비 건립도 내겐 마찬가지 의미가 있다. 도호쿠대 출신 김기림의 시비를 세운 건 시작일 뿐이다. 루쉰처럼 김기림의 유학 시절을 되살려 (그것이) 한국과 일본을 잇는 줄이 되기를 바란다.”
 
바다와 나비 (1939년 발표)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金起林) 시인 젊은 시절 모습. [사진 도호쿠대학 역사관]

김기림(金起林) 시인 젊은 시절 모습. [사진 도호쿠대학 역사관]

김기림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주지주의 문학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이상·백석·정지용 등은 그의 평론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됐으며, 특히 이상과는 사이가 매우 각별했다. 김기림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국내에선 학술논문에서조차 제대로 이름 표기가 안 되다 1988년 해금됐고, 이후 문학사적 위치를 되찾았다.  
한국에서 일본 시인의 시비를 건립하는 일을 기대하기 어려운데.
“왜 그런지 알고 있다. 패전의 영향으로 전후 일본에는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 진보 성향의 시민이 많아졌고, 비록 다수파는 아니지만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은 한국보다 일본이 지금 훨씬 넓다. 앞으로 한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일본인을 기리는 비가 한국에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최근 한국이 취한 일련의 조치에 대한 일본 내 평가는 어떠한가.
“한국 사정을 되도록 잘 이해하고 일본 사람들에게 설명해 온 입장에서 지금은 상당히 어렵다. 특히 20년 전에 맺은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공동선언을 통해 과거의 역사 문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결된 것으로 알았는데 다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나서 아쉽다. 일본인들은 이번 조치가 한국의 국내 정치 사정으로 일어났다고 본다. 한국민의 동의가 없어 한·일 간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런 대안이면 좋겠다는 정도의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아직 없다. 국가 간 외교관계에서 변화가 없을 순 없지만 ‘골대’를 옮긴다면 어느 쪽으로 옮길지를 확실하게 얘기해야 하지 않나. 저도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어떻게 대응할 걸로 보나.
“아베 정권에 비판적이지만 솔직히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선 놀랐다. 그동안 극우파처럼 행동했는데 사회당과 민주당 총리의 말을 그대로 계승하고 일본의 잘못을 인정했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국가의 일관성을 지키려고 한 것은 총리로서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이 (이제 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 오히려 아베 정권엔 한국을 공격할 핑계를 준 것이다. 합의 당시 지지층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는데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는 욕을 들어먹으면서까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강경한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당장 해결할 처방전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은 좋게 말하면 민주주의가 발달해 가고 있고, 나쁘게 말하면 포퓰리스트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어차피 그런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면 국민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단순하게 찬성이나 반대가 아니라 이슈별로 이건 일본이 문제고, 이건 한국이 문제라는 식으로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 일본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일본에 ‘하나의 일본’만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한국도 ‘하나의 한국’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국가 간, 정부 간에 문제가 있더라도 한·일 양국에서 목소리가 같은 사람끼리 작은 일부터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이 훌륭한 한국의 시인이 센다이에 살았고, 그분의 시와 인생을 돌이켜보면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기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서로 만나고 그런 작은 움직임이 계속 이어지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민간 차원에서 한·일 우호 증진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무라야마 정권 때도, 고이즈미 정권 때도, 아베 정권 때도 일본 시민사회의 입장은 흔들리지 않는다. 한국 또는 일본 정부가 바뀌건, 정부끼리 충돌하건 관계없이 민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 나갈 것이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의 일본 유학과 취업이 부쩍 늘고 있다.
“한국 외교부가 추진 중인 ‘3+1’ 프로그램(한국 3년, 일본 1년 졸업 후 일본 취업)에 우리 대학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국을 잘 모르는 한 동료 교수가 들은 얘기라면서 전해주는데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문제 삼고 있는 한국이 장차 한국의 장래를 이끌어 갈 젊은이를 일본에 보낼 테니 받아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순 아니냐’고 말했다. 나 역시 쉽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한국의 미래인 젊은이를 일본에 보내겠다는 건 정치인들이 말로는 강경하고 겉으론 온갖 퍼포먼스를 하면서 현실이 이렇다면 기만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기본적으로 한·일 간에 굳건한 믿음이 있어서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런 면에서 한·일 관계를 낙관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이제는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한국과 일본은 서로 도와야 살 수 있는 나라’라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이게 현실인데 숨길 수 있겠나.”
 
‘도호쿠대 유학생 김기림’ 찾은 아오야기의 소망
아오야기 유코

아오야기 유코

아오야기 유코(靑柳優子·사진)씨는 1930년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출신 도호쿠대 유학생이었던 시인 김기림을 발굴해낸 장본인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김기림의 시가 좋아서 그의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했고, 몇 년 동안 발품을 팔아가며 27세 청년 김기림이 도호쿠대가 있는 센다이(仙臺)에 남긴 4년간의 흔적을 따라갔다. 김기림의 유학 당시 사진을 찾아낸 것도 바로 그였다.
 
아오야기씨는 지난달 30일 시비 제막식에서 “1939년 4월 발표된 시 ‘바다와 나비’는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역사적 자각과 통찰, 예감으로 터득한 생존의 신념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문화는 평화와 자유의 친구이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후) 전 세계에 팽배한 적의와 오해의 감정을 녹일 것이며, 더불어 얼어붙은 빙하지대에 끝없이 ‘이해의 통로’를 열어갈 것”이라는 김기림의 평론을 인용했다. 최근 빙하기를 맞았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는 한·일 관계를 김기림 시비가 녹여내기를 소원했다.
 
그는 “우리 시민들은 김기림의 평화사상을 받아들이고, ‘루쉰의 마을’인 센다이가 언젠가 ‘김기림의 마을’로도 알려지길 바랍니다. 이번 시비 건립이 일·한 시민과 동아시아인들 사이에 새로운 ‘이해의 통로’를 열어가는 교두보가 되길 기원한다”고 기념사를 마무리했다.
 
차세현 기자 
 
센다이=차세현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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