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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인다고 모두 대머리인가, 알맞은 정의를 내려다오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세상은 부정확하고 조리에 맞지 않는 말들이 넘실대는 홍해와 같다. 오해와 몰이해의 위험으로 가득한 홍해를 가르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의사소통의 땅으로 건너가려 하거든,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를 가능한 한 날카롭게 벼려내어 의미의 피륙을 재단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논술문 쓰기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기말 논술문 과제제출이 다가올 무렵이면, 학생들과 함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토론을 벌이곤 한다.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학생들의 머리통을 찬찬히 둘러 본다. 혹시라도 젊은 나이에 탈모로 고통받는 학생이 없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현재 탈모가 진행 중인 중년의 선생보다는 다들 머리털 사정이 낫다는 것을 확인한 뒤, 마치 치국책(治國策)을 요구하는 심정으로 “정언명령”(定言命令)을 던지는 거다. “대머리를 정의하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학생 A가 냉큼 대답한다. “반짝이는 거요! 대머리는 반짝반짝!” 그 정도 도발로 흔들릴 정도로, 중년의 선생이 순진하지는 않다.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반짝임은 대머리의 부수 현상일지는 몰라도 대머리의 정의(definition)는 아니겠죠. 대학생이 되었는데, 아직 셰익스피어도 안 읽었나요?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는 말도 있죠. 반짝인다고 다 대머리는 아닙니다.” 설득당하는 연습이 부족한 학생답게 A는 포기할 줄을 모른다. “환하게 불이 들어오는 거요. 대머리는 불 들어온 인간 전구.” 선생을 놀리려는 수작임을 알고 있으나, 놀랄 일은 아니다. “음, 그건 대머리의 정의가 아니라 대머리의 비유겠죠.”
 
 
논술문 과제 놓고 학생들과 건곤일척 토론
 
지난해 개봉한 영화 ‘킹아서 ’에서 보티건 역으로 출연한 주드 로. 탈모가 확연하다. [AP]

지난해 개봉한 영화 ‘킹아서 ’에서 보티건 역으로 출연한 주드 로. 탈모가 확연하다. [AP]

상황이 이쯤 되면, 대머리가 진지하게 정의해 볼 필요가 있는 대상임을 역설할 필요가 있다. “주드 로(Jude Law)라는 절세 미남 배우가 있었죠. 한때 주드 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어요. 그러나 그에게도 탈모가 시작되었고, 영화에서 점점 주드 로를 보기 어렵게 되었죠. 즉 대머리란 한 세계적 배우의 경력을 좌우할 만한 사안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어도, 학생들은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눈치다. 주드 로의 영화 출연이 뜸해졌으니, 이 학생들이 주드 로를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에 나는 좀 더 절실한 예를 들어준다. “보다시피 저는 탈모가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현재 애매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요. 여러분보다는 머리털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직 대통령 J만큼 화끈하게, 순수할 정도로, 대머리가 된 건 아니죠. 이른바 경계인이죠. 발모인의 나라에서 탈모인의 나라로 이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탈모인의 나라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닌, 즉 디아스포라(diaspora·離散)를 겪는 중이죠. 나 같은 경계인에게는 대머리의 정의가 특히 중요해요. 대머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대머리에 포함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대머리의 정의가 선생의 실존에 관계된 사안임을 인지하자, 학생들은 좀 더 진지해진다. 학생 B가 주장한다. “대머리는 머리털이 적은 상태를 말합니다.” “머리털이 적은 상태라니? 도대체 얼마나 적어야 대머리가 되는 거죠? 철학자 티모시 윌리엄슨은 머리털의 배열과 머리털의 길이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어요.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볼게요. 똑같이 만 개의 머리털을 가졌다고 해도, 머리가 작은 소두인(小頭人)은 그 정도 머리털만으로도 두피를 가릴 수 있는 반면, 머리가 큰 대두인(大頭人)은 두피를 가리지 못해서 대머리가 되기 쉽겠죠. 그리고 머리털이 만 개면 뭐하고, 일억 개면 뭐하겠어요. 일억 개의 머리털이 뒤통수에만 빼곡하게 나 있다면, 결국 대머리겠죠. 머리털 수 가지고는 대머리를 효과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워요.”
 
 
말의 재정의는 사회의 마음 변한다는 표시
 
머리숱이 많았던 2004년 주드 로의 모습. [REUTERS]

머리숱이 많았던 2004년 주드 로의 모습. [REUTERS]

학생 C가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면, 빠지는 머리카락 수로 대머리를 정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하루에 삼백 개 이상 머리털이 빠지면 대머리다…이런 식으로.” “음, 대머리를 고정된 상태라기보다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자는 거군요. 그런 식이라면, 원래 뒤통수에만 머리털을 가지고 태어났으되, 그 머리털은 좀처럼 빠지지 않는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그 사람은 분명 하루에 삼백 개 이하의 머리털이 빠지겠지만, 대머리 소리를 들을 테니 말이에요. 차라리 빠지는 머리카락 수와 새로 나는 머리카락 수의 비율로 대머리로 정의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이때 학생 D가 날카로운 논평을 던진다. “방금 대머리 소리를 듣는다는 표현을 쓰셨죠. 그렇다면, 대머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가요, 남들에게 대머리로 간주될 때야 비로소 대머리가 존재한다는 말씀인가요?” 멋진 논평이었기에, 일단 칭찬을 해줄 필요가 있다. “김춘수의 유명한 시 ‘꽃’과 같이 아름다운 질문이네요. 김춘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바 있죠. 방금 학생의 논평을 시로 쓴다면 이렇게 되겠네요. ‘내가 그를 대머리라고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두피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를 대머리라고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대머리가 되었다.’”
 
바로 이때 학생 E가 D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대머리라는 것이 남들이 그렇게 부르냐 마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대머리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겠네요. 사람들이 대머리 운운하지 않으면 대머리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어서 “이걸로 대머리 치료제 특허를 내도 되겠는데요.”라고 빈정거린다. E와 D가 싸우기 전에 선생은 재빨리 개입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제 토론은 마무리하고, 강의로 넘어간다.
 
김춘수의 시 ‘꽃’의 다음 구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즉 단순히 어떤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죠.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야 비로소 그 이름은 현실이 되지요. 즉, 한두 명이 대머리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수가 기꺼이 그런 길을 따르면, 정말 대머리라는 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르죠. 잘은 모르지만, 변발이 유행하던 청나라 때는 대머리 인식이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빠지는 머리털을 볼 때마다 변발이 다시 유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때 변발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오늘날 통용되는 대머리의 정의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겠지요. 말이 재정의되는 일은 한 사회의 마음이 변화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좋은 대학’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볼까요? 오늘날 ‘좋은 대학’이라는 말의 뜻은 대개 입학생들의 수능성적이 높다는 뜻이죠. 입학한 뒤에 받게 되는 교육의 내용이나 학생들의 체험에 대해서는 고려가 거의 없죠. 그러나 언젠가 좋은 대학이라는 말이 재정의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대학교육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따라서 입학시험성적보다는, 입학할 때와 졸업할 때를 비교하여, 가장 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게끔 하는 대학이 좋은 대학일 겁니다. 이런 식으로 좋은 대학을 재정의 하게 되는 때가 오면, 이른바 대학의 서열이라는 것도 달라질지 모릅니다. 변화는 언제 올까요? 오기는 할까요?
 
 
북한 여성에 대머리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깨닫는다고 하여, 사회적 현실이 곧 변하지는 않지요. 변화란 쉽지 않습니다. 뿌리 깊은 인간의 열망에 호소할 수 있을 때만 변화가 가능하겠죠. 중국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가했다가, 북한 여성 한 명과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나네요. 북한 사람들의 생활상이 궁금하여 이것저것 묻다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북한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남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녀는 준비라도 한 듯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인격이 훌륭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오, 과연. 재차 물었습니다. “인격이 가장 중요한가요? 인격이 훌륭하면 다른 것들은 상관없나요?” 그녀는 여전히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돈이 없어도 인격이 훌륭하면 여성들이 좋아합니다.” 다시금 물었습니다. “남자가 대머리여도 상관없나요?” 갑자기 그녀가 주춤하고, 짧은 침묵이 흘렀습니다. 벌목 중인 야산과 같은 내 두피를 흘낏 본 뒤, 이내 “대머리여도…상관없습니다!”라고 소리 높여 대답했다. 그것으로 그 대화는 끝났지만, 나는 북한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 짧은 침묵을 떠올립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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