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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갈 데까지 가보자는 소득주도 성장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퇴임 전 “한국 경제의 누적된 모순은 시장에서 만들어졌다. 경제를 시장에만 맡기라는 일부 주장은 더 큰 모순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했다. 시장이 적폐라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단락적으로 반복되는 경제위기론은 개혁의 싹을 미리부터 잘라내려는 것”이라 했다. 소득주도 성장의 건전한 비판마저 음모론으로 몰아 아예 귀를 닫겠다는 뜻이다.
 
일반인에겐 이런 행태가 생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소득주도 성장의 원전(原典)을 읽어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 주변에서 이 개념을 입력시킨 인물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두 개의 글이 있다. 하나는 2012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나온 ‘임금주도성장:개념, 이론, 정책’ 논문이고, 또 하나는 이 논문을 집필한 캐나다 오타와대 마크 라부아 교수가 쓴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이란 책이다.
 
다음은 소득주도 성장론자들에게 바이블이나 다름없는 이 책의 내용이다.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파괴적 경쟁과 낭비를 초래한다.”(211쪽) 그래서 “국가가 시장을 규제해야 하고 총수요를 관리해야”(45쪽)하며 “지속적인 국가 개입만이 높은 완전고용 수준 근방에서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168쪽).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문재인 정부가 노동개혁을 외면하고 귀족노조만 챙기는 건 당연하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고 주 52시간 노동을 강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노동 구조개혁은 일자리 불안을 야기”(19쪽)하며 “강력한 노동조합이 존재해야 실질임금 하락을 차단해 전체 고용·생산·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168쪽) “일자리 나누기도 시간당 실질임금의 상승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효 수요의 감소를 초래할 것이다.”(175쪽)
 
이철호칼럼

이철호칼럼

소득주도 성장론은 이처럼 자유경쟁과 시장경제를 증오하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부정한다. 그래서 국가가 가격도 관리하고, 임금도 올리고, 금융도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친노동적 분배를 위해 “확장적 재정 정책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쪽)
 
그렇다면 소득주도 성장이 정말 성공한다고 믿는 것일까. ILO 논문에서 눈여겨볼 점은 경제학 논문답지 않게 “~일 가능성이 크다” “~할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등의 모호한 표현들이 넘쳐난다. 그만큼 무리한 가정과 논리적 비약이 뒤섞여 있는 가설이다. 임금 상승이 소비를 늘리고 경제를 성장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상관관계만 주장할 뿐 확실한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대목은 은근슬쩍 소득주도 성장의 실패 가능성까지 깔아 놓았다는 사실이다. 마크 교수의 책은 “개방경제에서는 실질임금 상승이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지 모른다”(200쪽)고 경고한다. 자칫 수출이 줄고 수입은 늘어나 소득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연금 등) 사회보장제도가 완비되지 않으면 소득이 올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릴 수 있다”(237쪽)고 지적했다. 이런 경고에 비춰 보면 한국은 경제 규모 대비 수출입 비중이 84%(미국은 26%)로 대표적인 개방경제에다 국민연금도 해마다 개혁 목소리가 나올 만큼 허약하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소득주도 성장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것을 알고도 생체실험을 강행한 셈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임금 인상이 총수요(소비)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만 강조할 뿐 총공급(고용·물가·경쟁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외면한다는 점이다. 임금은 소비의 원천이자 기업 입장에선 생산비용이다. 문재인 정부가 최저임금을 급등시키고 노동시간을 단축시키자 생산비용이 치솟으면서 총공급 부분에서 발작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고용·생산·소비지표가 일제히 곤두박질하고 단순·임시직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소득분배 지표도 나빠졌다. 결국 소득주도 성장은 “함께 잘살자”는 이상과 달리 없는 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국가 경제 전체를 갉아먹고 있다.
 
경제에는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잘못된 방향으로 속도를 높이면 경제는 더 빨리 망가지게 된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며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청와대 주변에는 소득주도 성장의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자멸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퍼지고 있다. 자기들끼리 오기를 부리며 정책의 일관성으로 착각하는 분위기다. 이제 갈 데까지 가봐야 할 모양이다. 어느새 소득주도 성장이 이념주도 성장으로 변질되면서 마치 종교화되는 분위기다. 청와대가 “참고 기다리면 좋아질 것”이라고 막연한 주문만 외우며 오지 않을 메시아를 무작정 기다리는 게 아닌지 불길하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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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