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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갑자기 깎인 연구예산…외국인 석학들 "약속 지켜라" 靑 서한

흔들리는 한국판 노벨상 프로젝트
정부가 국제적으로 공언한 것과 달리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비를 깎아 논란이다. 사진은 IBS 중이온가속기 건설 현장. [사진 IBS]

정부가 국제적으로 공언한 것과 달리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비를 깎아 논란이다. 사진은 IBS 중이온가속기 건설 현장. [사진 IBS]

한국판 노벨상 프로젝트가 흔들리고 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얘기다. IBS는 “노벨상에 근접했다”는 국내·외 과학자 28명을 불러와 분야별 연구단장으로 임명했다. 한국 정부가 ‘장기·자율 연구와 연구비 지원’을 약속하고서다. 기초과학에 제대로 투자해 장기적인 혁신을 일으키려는 목표였다. 일부 외국인 과학자는 초빙 계약을 맺을 때 연구비 지원 약속까지 계약서에 넣었다. 그러나 내년도 예산을 세우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연구비를 깎았고, 연구의 자율성도 옥죄기 시작했다. 연구단들은 불안감에 웅성거리고 있다. 급기야 외국인 석학 연구단장들이 공동명의로 항의 편지를 청와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IBS는 이명박 정부 때 추진했다. 모토는 ‘세상을 바꿀 거대한 기초과학 연구’다. 거기서 나오는 창조적 지식을 기반으로 글로벌 혁신을 선도하겠다는 의미다. 기존처럼 정부가 일일이 간여하는 단기 과제 위주로는 ‘파괴적 혁신’을 이루기 어렵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 또한 ‘장기간의 자율 연구’를 내세웠다. 그래야 창의적 연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모델은 노벨상 수상자 33명을 배출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다.
 
암흑물질 실험 장비다. [중앙포토]

암흑물질 실험 장비다. [중앙포토]

IBS는 ‘장기·자율 연구’ 철학을 전 세계 과학계에 알리며 연구단장을 모았다. 정부가 “최대 100억원까지 연구비를 10년간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이런 제안에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이 응했다. 외국인 석학들은 정년을 보장받은 현지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왔다. 지난해 한국연구재단이 “노벨상에 근접했다”고 발표한 국내 과학자들도 합류했다. 현택환 나노입자 연구단장(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김빛내리 RNA 연구단장(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등이다.
 
그렇게 2011년부터 순차적으로 28개 연구단이 설립됐다. 연구단이 자리를 잡으면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발표 논문이 폭증해 세계 최고의 학술지 ‘네이처’는 2016년 IBS를 ‘떠오르는 별(rising star)’로 지정했다. 연구의 질을 보여주는 ‘피인용 상위 1% 논문 비율’은 지난해 7.7%로 막스플랑크연구소(4.6%)를 눌렀다. 정부는 약속대로 연구비를 지원해 이런 결과를 뒷받침했다. 연구비 항목을 일일이 심사하지 않고 통으로 예산을 배정했다. ‘자율 연구’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정부가 태도를 바꿨다. ‘장기 자율 연구 및 연간 최대 100억원 연구비 보장’이라던 약속과 달리 연구비 내용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내년도 예산을 깎았다. 최종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면 올해 1개 연구단 평균 73억원이었던 연구비는 내년에 65억원으로 11% 줄어든다.
 
대전 IBS 본원. [사진 IBS]

대전 IBS 본원. [사진 IBS]

IBS 연구비를 정부가 깎은 것은 처음이다. 당장 내년 연구에 차질이 생긴 연구단장들은 지난달 중순 대전 IBS 본원에서 긴급 회동했다. 당시는 “연구비가 회복될 수도 있다. 추이를 지켜보자”는 정도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이달 중순 통보받은 2차 예산안은 깎인 그대로였다.
 
외국인 연구단장 9명은 공동으로 편지를 작성해 청와대와 과기정통부에 보냈다. 이들은 서한에서 “우리가 고향을 떠날 때 한국 정부가 했던 약속이 존중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예산 삭감 때문에 지금까지 해온 주요 연구 일부를 중단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유능한 과학자들이 한국을 떠날 수 있으며, 한국 정부의 신뢰 또한 떨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답신은 오지 않았다. 서한을 공동 작성한 스티브 그라닉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장은 “장기·자율 연구라는 IBS의 비전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편지를 썼다”고 말했다.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였던 그는 IBS 제안으로 2015년 한국에 왔다.
 
왜 장기·자율 연구가 중요한가.
“그 비전 때문에 톱 레벨 과학자들이 한국에 오지 않나. ‘내년 연구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장기적으로 야심 찬 연구를 할 수 있다’고 하면 모두 부러워한다.”
 
계약서에 지원 약속이 담겨 있었나.
“계약서 내용은…. 처음엔 정부가 내 연봉만 얘기하더라. 나는 ‘연봉 때문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연구단(center of international excellency)을 만들기 위해 한국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결국 나는 한국 정부를 믿고, 그들은 나를 믿기로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동의했던 재정 지원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애초 약속을 지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꿀 것 같은가.
“한국은 이제 원래의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정말 걱정되는 건 내년 초 우리 연구단에 대한 성과 평가다. 평가 패널 3분의 2가 외국 학자다. 평가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국제적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worst possible case)다.”
 
지난해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양자나노과학 연구단장은 한창 시설을 만드는 초기에 예산이 삭감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 연구센터를 만드는 데 3년쯤 걸리고 성과를 내려면 몇 년이 더 필요하다. 장기간 안정적인 연구비 지원이 필수다. 처음부터 흔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장 내년도 실험시설 구축 계획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 나도 연구와 관련해 한국에 한 약속(우수한 연구단을 만드는 것)을 지킬테니 한국도 나에게 한 약속을 지켰으면 한다.”
 
한국인 연구단장들 역시 노심초사다. 현택환 단장은 “연구비가 부족해 박사급 연구원 절반 이상에게 나가달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연구비 심의에도 일부 불만이 나온다. 지난해까지 계속 예산을 통배정하다가, 내년도 연구비부터 정부가 항목별로 일일이 들여다보기 시작해서다. 연구단장들 역시 소중한 세금이 새지 말아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면서도 “기초과학의 자율성을 인정해 달라”고 한다. 국제 학술회의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거나 성능 뛰어난 연구 장비를 발견했는데, 때를 기다려 예산 신청하고 심의받아 관련 연구를 시작하면 뒤질 수밖에 없다는 이유다. IBS가 모델 삼은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연구비를 ‘지난해보다 몇 % 증가’식으로만 결정해 연구단에 주고 있다. 세부 집행은 연구단이 알아서 한다.
 
국제적으로 신뢰도가 떨어질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IBS에 대한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는 현 정부가 내건 ‘풀뿌리 기초과학’이다. 연구비를 집중하기보다 대학 등에 골고루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IBS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연구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마당에 IBS의 연구비를 줄이는 것은 나라의 혁신 경쟁력을 깎아 먹는 일이 될 수 있다.
 
행여 전 정부의 업적인 IBS를 지우기 위해 ‘풀뿌리 기초과학’을 내세웠다면 더욱 안 될 말이다. 대학의 연구를 육성하는 것도 좋지만 그 때문에 세계가 탐내는 기초과학 연구 역량을 훼손하지는 말아야 한다.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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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