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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읽기] 야구장 예찬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그곳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야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층간 소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음껏 소리를 지를 수 있어서 좋다. 외로움이 편만한 세상에서 수많은 내 편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그곳에 가는 사람들과 지하철에서 나누는 무언의 눈인사가 좋다. 그곳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쿵쾅대기 시작하는 심장 소리가 좋다. 마침내 푸른 잔디와 선수들과 전광판이 눈 앞에 펼쳐질 때, 생계와 생활의 저편에서 쾌락과 향유의 이편으로 넘어오는 기적을 경험한다. 야구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세의 기적인 셈이다.
 
그러나 야구장에서 경험하는 행복에는 그런 감각적 쾌락만 있는 것이 아니다. 뜻밖에도 야구장은 자기 성찰의 장이기도 하다. 수많은 관중이 동시에 열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연안부두’와 ‘부산 갈매기’와 ‘목포의 눈물’을 부를 때마다 안도현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과연 나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이토록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는가. 우리 사회에서 과연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이처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이렇게 자문할 때마다 감사를 경험하고 겸손을 다짐한다.
 
야구장은 인간의 경이로움 앞에서 탄성을 자아내는 자리이기도 하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우리 눈이 궤적을 추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타석을 향해 날아온다. 공을 끝까지 보라는 조언은 현실과는 먼 이야기이다. 날아오는 물체가 가까워질수록 체감 속도가 늘어나기 때문에 공을 끝까지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타자들은 공이 투수 손을 떠나는 순간 이미 공이 타석의 어느 곳으로 들어올지를 예상하고 스윙을 시작해야 한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을 본다고 알려진 메이저리그의 전설 테드 윌리엄스조차도 그것이 불가능함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공을 잘 쳐 낸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장석주, ‘대추 한 알’ 중에서)
 
장석주 시인의 시구처럼, 선수들의 스윙은 저절로 만들어졌을 리 없다. 수많은 피, 땀, 눈물과 반복이 만들어낸 스윙임이 틀림없다. 어디 타자뿐이겠는가. 낙하지점과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예측해서 그림 같은 수비를 해내는 수비수들은 어떤가. 투수의 강속구와 변화구는 또 어떤가. 야구장은 이런 경이로움이 연속해서 연출되는 무대이다.
 
야구장은 역설적이지만 명상의 장이기도 하다. 야구장에서는 종종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고 온전히 공 하나에 집중한다. 경기에 집중할수록 함성은 커지지만 의식은 또렷해지고 마음은 천천히 움직인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서전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외부 세계에 집중하는 경험, 수단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지긋지긋한 자의식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몰아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것이 곧 명상이 아니던가.
 
자아가 사라지니 행동이 자유롭다. 점잖은 사람도 상대 선수를 욕한다. 그런데 상스럽지가 않다. 누군가는 벌떡 일어나 춤을 춘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피하기는커녕 대놓고 연인과 뽀뽀를 한다. 규제와 절제와 억압이 가득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원초적 자유를 경험한다. 삶의 자기 결정권이 최대한 발휘되는 장소가 바로 야구장이다.
 
그렇게 소리 지르고 욕설을 퍼부었는데도 경기가 끝나고 나면 상대편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존경과 연민이 생겨난다.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 SK 팬들은 두산 팬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내년에는 두산 우승’이라고 외쳐준다. 두산의 구단주는 SK 구단주를 찾아가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하를 받은 SK 구단주는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모두가 해방의 경험을 했기에 미움보다는 우정이, 질투보다는 존경이 생겨나는 것이다.
 
좋아하면 응원하지만 응원하면 좋아하게 된다. 야구를 좋아해야만 야구장에 간다고 생각하지만, 야구장에 가면 야구를 좋아하게 된다. 그리고 야구장에 가면 뜻밖에도 감각의 즐거움뿐 아니라, 감사와 겸손과 경이로움과 명상과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꼭 야구장뿐이겠는가. 축구장도,  농구장도, 콘서트장도, 극장도, 우리 뇌에는 모두 야구장이다. 열광하는 것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행복이다. 당신의 야구장은 어디인가?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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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