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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하재주, 과기부 5월부터 사퇴압력···고충 토로"

“20개월 동안, 아니 그 전부터, 지속적으로 감사ㆍ검사ㆍ조사ㆍ점검 등 얼마나 많은 직원이 힘들었나. 참으로 고생 많았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죄송하다. 기죽지 말길 바란다” 
 
20일 대전시 유성구 덕진동 한국원자력연구원(원자력연) 강당에서 하재주 20대 원자력연 원장이 이임식을 가졌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20일 대전시 유성구 덕진동 한국원자력연구원(원자력연) 강당에서 하재주 20대 원자력연 원장이 이임식을 가졌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20일 하재주(61)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끝내 사퇴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적극적이지 못해 자진 사퇴 압박을 받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치러진 ‘의혹 속’ 이임식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인 지난 3월 취임한 하 원장은 임기인 36개월을 다 채우지 못한 채 1년 8개월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다.
 
탈원전으로 원자력 가치 극심한 혼란…“과학자 자긍심 지켜달라”
 
하 원장은 이임사를 통해 직원들을 독려하면서도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새 정부가 출범해 에너지 전환정책이라는 큰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원자력연구원의 정체성과 원자력 기술의 가치에 대해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며 “10여년 전 있었던 해체 폐기물 문제 등 과오를 털기 위해 자진 신고제를 운용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안전협약도 맺었지만, 그 계획의 이행은 제 몫이 아닌가 보다”고 밝혔다. 이임사 중에도 그는 자주 목이 메는 듯 물을 마셨고, 숨을 고르며 말을 멈추기도 했다. 
 
하 원장은 이임사를 통해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 직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기보다 과학기술자의 자긍심을 지켜달라"고 주문했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하 원장은 이임사를 통해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 직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입히기보다 과학기술자의 자긍심을 지켜달라"고 주문했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이제는 우리 사회가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기보다,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비판으로 잘못된 일을 바로잡되 과학기술자의 자긍심은 지켜달라.” 
 
이임사가 끝나자 중간중간 탄식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했다. 1992년 원자력연구원에 입사해 평생을 원자력 기술개발에 바친 연구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자 안타까움이 담긴 박수였다.
 
과기부, 21년 전부터 축적된 문제 이유로 현 원장 사퇴요구
 
이임사에 담긴 하 원장의 작심 발언은 그간 이른바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원자력연구원에 쏟아진 외압을 짐작게 한다. 실제로 이임식을 하루 앞둔 19일 장인순 원자력연구원 고문은 중앙일보와 단독 인터뷰에서 “하 원장이 지난 3월부터 수차례 직접 찾아와서 고충을 토로했다”며 “정부가 지난 5월부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통해서 지속해서 사퇴 압력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장 고문은 “과기정통부가 하 원장에게 제시하는 사퇴의 이유는 전 기관장을 비롯해 하 원장 취임 이전부터 축적됐던 문제들”이라며 “이를 현재 기관장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정문 현판. [연합뉴스]

한국원자력연구원 정문 현판. [연합뉴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에 따르면 그간 하 원장에게 쏟아진 압박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21년 전인 1997년~2008년까지 원자력연구원은 11년간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3’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납 등 금속 폐기물을 무단으로 폐기ㆍ거래해 물의를 일으켰다. 14년 전인 2004년~2011년에도 자체 원자로 연구시설을 해체하면서 나온 폐기물을 무단으로 처분했다. 올해 1월에는 가연성 폐기물 처리시설에서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수도관에 설치한 열선이 과열돼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문제는 사건의 발생 시기를 고려할 때 1월 화재 외에는 하 원장이 직접적으로 책임질만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장인순 원자력연구원 고문은 “기관장의 잘못이라면 파문하면 되지만, 잘못이 없으면 임기를 보장하는 게 원칙”이라며 “하 원장의 사퇴는 책임을 인정한 것이 아닌 압박에 이기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사권자도 몰랐던 자진사퇴 압박…원자력연 "OECD 국장 역임한 전문성 갖춘 리더 상실"
 
20일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읽는 하재주 원자력원장. 장인순 원자력연 고문은 19일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은 과기정통부에 의한 자진사퇴 압박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20일 열린 이임식에서 이임사를 읽는 하재주 원자력원장. 장인순 원자력연 고문은 19일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은 과기정통부에 의한 자진사퇴 압박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석연치 않은 점은 또 있다. 원자력연구원장의 직접적 인사권자인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이 하 원장의 자진 사퇴 압력에 대해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 고문에 따르면 하 원장은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제가 사퇴하는 걸 원하시느냐”고 물었고 원 이사장은 “금시초문”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과기정통부의 탈법적인 직접 압력이 있었다는 해석이 나오는 또다른 증거다. 김경호 전국과학기술전문노동조합 대외협력위원장은 “정부에서 내려온 이른바 ‘반핵 인사’가 고문으로 부임하며, 원자력연구원 과제 수행을 위한 결재가 지연되는 등 지장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하 원장이 의혹 속에 사퇴하면서 원자력연은 전문성을 갖춘 리더를 상실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 원장이 2015년 3월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 원자력기구(OECD NEA) 원자력개발국 국장을 지내는 등 초지일관 원자력 전문가로서 길을 걸어온 데다, 지난해 3월 취임 후 떨어진 직원들의 사기를 독려하고 지역주민과 소통을 강화하는 등 부단히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자력원구원 관계자는 “지난 9월 15일에는 지역 주민들과 연구원 직원들이 함께 체육대회를 여는 등 소통이 강화됐다”며 “혹여나 향후 전문성이 떨어지는 시민단체장 등 인사가 원장을 취임할까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밝혔다.
 
이임식이 끝난 직후 원자력연 본관에서 직원들과 마지막 사진촬영을 가진 하재주 원장.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이임식이 끝난 직후 원자력연 본관에서 직원들과 마지막 사진촬영을 가진 하재주 원장. [사진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원 인근 주민들도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주우 원자력시설안전을위한주변주민협의회 회장은 “분기마다 주민협의회에 참가해 소탈하게 소통해온 원장이 그만두게 돼 아쉽다”고 밝혔다. 이임식이 끝난 후 체육복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을 나온 하 원장은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밝히며 원자력연구원을 떠났다. 앞으로 차기 원장 임명 전까지는 백원필 부원장이 원장 직무대행을 맡게 된다.
 
한편 이런 우려 속에 정부의 탈원전 정책 기조가 오히려 원자력에 대한 위험을 가중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2007년까지 한국원자력연구원 연수원장을 지낸 민병주 전 자유한국당 의원은 "탈원전 가속화로 원자력 산업이 붕괴하면 본래 의도와 달리, 현존하는 원전이 더욱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후쿠시마를 겪은 일본도 오히려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대전=허정원·문희철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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