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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패거리의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노동조합은 남의 고통도 생각하는 윤리적 감수성을 대전제로 존재한다.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대의를 잊고 내 밥그릇만 챙기는 순간 정당성은 소멸된다. 그저 패거리를 위한 정의만 남는다. 그건 정의가 아니다. 한국의 노조는 과연 어느 쪽인가. 윤리적 실천집단인가, 아니면 이기적 패거리 집단인가.
 
산업화 와중의 인류가 앓았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열병을 우리도 혹독하게 겪었다.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공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이 스물세 살의 청춘을 역사의 제물로 바치면서 외친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였다. 그가 시대의 양심을 깨우자 엘리트 대학생들은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용접공이 되어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임금이 올라가고 근로조건이 개선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출발점은 이타성이었다.
 
대규모 사업장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이 하청기업 비정규직과 1500만 명의 노조 미가입 근로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외면하는 지금의 모습은 이타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민주노총은 고질적인 계파갈등 속에서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가입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주52시간제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탄력근로제 확대에는 막무가내로 반대하면서 모레 전국적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예고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노동조합인가.
 
불신은 임계점을 넘기 직전이다. 민주노총이 유일한 상생모델인 ‘광주형 일자리’를 끝내 거부한다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파산선고가 될 것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반값 연봉의 근로자 1000명이 일하는 연산 10만 대 완성차 공장을 만들어 직간접 일자리 1만1000개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중앙정부와 광주시가 손잡고 주택·교육·의료·육아 등 편의시설을 지원해 임금을 보전하게 된다.
 
이하경칼럼

이하경칼럼

변변한 직장이 없는 광주의 청년들과 동종업계 세계 최고의 임금에 휘청거리는 현대·기아차에는 축복이다. 민주노총은 반대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근로자의 평균연봉은 9400만원인데 4000만원 안팎의 일자리가 생기면 연봉이 깎일 것을 걱정해 결사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딸의 일자리를 아버지가 막고 있는 셈이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현대·기아차 1차 협력업체 근로자는 평균 4900만원, 2차 협력업체는 3300만원, 사내하청 비정규직은 23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본사 정규직은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4배 이상을 받고 있다. 광주형 일자리는 이런 현대판 카스트제도를 부숴버리고 모두에게 같은 임금을 주려한다. 노조만 반대하지 않으면 동일노동·동일임금이 한 방에 실현되는 것이다.
 
국내 완성차 업계 5곳의 지난해 평균임금은 9072만원인데 폴크스바겐·도요타 등 글로벌 업체 연봉은 8400만원 안팎이다. 자동차 한 대 만드는 데 한국이 평균 26.8시간 걸리는데 르노자동차는 16.2시간이면 된다. 이런 고비용·저효율 구조는 강성 노조가 매년 파업을 통해 회사를 압박해 얻어낸 결과다.
 
현대·기아차는 22년 전인 1996년 아산공장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이 땅에 공장을 짓지 않았다. 대신 중국·인도·남미·미국에 19개 공장을 지어 5만700개 일자리를 만들었다. 지금 한국 기업의 설비투자는 외환위기 직후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자리는 없고 젊은이들은 희망을 잃었다.
 
암울한 현실의 출구가 될 수 있는 광주형 일자리는 독일 폴크스바겐 ‘오토 5000’의 성공을 모델로 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2002년 국내의 고임금을 못 견뎌 신차공장을 동유럽에 세우려 했다. 그러다 마음을 바꿔서 기존 임금의 80%만 받겠다면 국내에서 고용하겠다고 노조에 제안했다. 노조가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내세워 거부하자 슈뢰더 총리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그는 폴크스바겐의 하르츠 노무이사의 생일파티에 노사 관계자 모두를 초청했다. “경영자뿐 아니라 노조도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책임져야 한다”고 노조를 설득했다. 협상은 타결됐고, 그해 5000명의 실업자가 채용돼 ‘오토 5000’은 성공했다.
 
광주형 일자리가 성공하면 다른 기업들도 앞다퉈 국내에 공장을 짓고, 청년들의 일자리도 넘쳐날 것이다. 한국GM이 철수한 군산의 1만3000여 숙련 실직자들도 그대로 남아 있는 30만 대 생산시설에서 다시 일할 수 있다.
 
진보 정치인 슈뢰더가 노조를 설득했듯, 진보 노동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노조와 담판을 지으면 좋을 것이다. 아들딸의 일자리와 하청기업 근로자, 비정규직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기 위해 양보하라고 촉구해야 한다. 민주노총도 패거리가 아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과 관용, 연대의 정의를 위해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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